산책하는 혼잣말

저는 이곳이 지금 같은 굴이 아니었을 때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온통 어둠으로 가득했지요.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곳에 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세계는 원래 그런 것으로 생각했기에 짙고 검은 시간이 무섭진 않았어요. 게다가 사방엔 언제나 떨림이 있었고 떨림은 여러 모양의 파동으로 제게 말을 걸었어요.

언젠가 요란한 소리가 저를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소리를 내며 구멍을, 이 굴을 만들었어요. 저는 무언가 빼앗긴 기분이 들었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이리저리 움직였답니다. 그러다 빛을 만났어요. 만나는 순간 빛도 떨림처럼 제가 있지 않을 때부터 있어 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빛은 말없이 제 모습을 알려 주었어요. 저는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기도 하고 이런 모양이었다가 저런 모양이었다가 혼란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운 형태였습니다. 지금은 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말이죠.

이 꼴이 된 건 그들이 세운 벽 때문인데… 그들은 정말 세우고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고 또 무너뜨리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벽을 세울 때부터 그들이 다시 벽을 부술 거란 생각에 피곤해진 저는 벽 뒤에 잠시 있기로 했습니다. 오목하게 비어 있는 곳에서 파동과 대화하며 지냈어요. 간혹 그들이 벽을 향해 말했습니다. 벽을 부수려고 궁리하는 것인지 벽과 대화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심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이리저리 구르며 빈 공간에 몸을 맡기고 파동을 만지며 지내다가 빈 곳을 가득 채우고 말았습니다. 틈이 없는 어둠에서 나고 자란 저에게 비어 있는 것과 꽉 낀 것은 다르지 않아서 저는 제 꼴이 이리된 줄 몰랐답니다. 벽 너머로 나오면서 알게 되었죠.

소리가 났습니다. 그들이 세우고 부술 때 나는 요란하고 괴이한 소리가 아니었어요. 그들이 만든 파동 중에서 가장 알 수 없는 것이었고 그만큼 익숙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건 하나가 아니기도 하고 하나이기도 한, 저런 모양이 아니기도 했다가 이런 모양이 아니기도 한 자유로운 동시에 혼란스러운 떨림이었어요. 그 소리의 형태가 궁금해서 이끌리듯 앞으로 나와 섰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 떨림을 그려 보고 상상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아니요, 기억을 다시 만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시간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는 분명 그들이 낸 파동을 들었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떨림은 아직 제가 듣지 않은 소리랍니다. 곧 듣게 될 거예요.

/ 작가 김시원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소재 또는 주제로 삼아 작업한다. 글을 쓰고, 쓴 글을 다시 따라가며 일시적인 실천을 만들어 낸다. 지시문, 반복, (전시)공간, 비물질과 같은 단어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에 관심이 있다.  www.kimsiwon.com

*이 글은 《너무 늦지 않은》 전시의 참여 작품 〈무제(이끌리듯), 2023〉를 위해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