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언어를 끌어안는 마더후드”

1.

엄마가 된 이후로 나는 줄곧 어떤 분열에 감정이 널뛰곤 한다. 이는 아마도 아이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낯선 아이의 모습에 곧바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오랜 산통에 지쳐 아이를 만났다는 기쁨보다 고통이 끝났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모유수유가 더는 힘들어졌을 때, 모유가 넘치는 ‘어머니’의 모습은 나를 좌절하게 했지만, 가슴이 돌덩이가 되는 경험은 빨리 벗어나고 싶은 지옥 같았다. 하루아침에 엄마라는 역할을 해야 하는 내가 나도 당혹스러운데, 세상 밖으로 나와 놀란 것은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밤낮으로 울어대는 아이를 붙잡고 공포에 사로잡혀 함께 울기도 했다. 그리고 기대한 것들을 쉽게 배반하는 나 자신의 취약함에 번번이 실망했다. 독립 이후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온 엄마는 내게 모성을 강요하고, 헌신적인 남편 역시 그가 나보다 ‘더 많이’ 포기한 것은 없어 보였다. 부여된 역할과 낯선 책임감 사이에서 나는 “어머니이면서 어머니가 아니어서 방황(정희진)”하고 있었다.

‘마더후드’란 무엇일까.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의 생물학적인 자질인 걸까? 이미 많은 페미니스트가 말해온 것처럼 모성은 여성들에게 강요되어온 성역할이다. 당연하게도 처음부터 어머니 역할에 대해 알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아이와 만나 엄마라는 이름의 정체성이 하나 더 추가될 뿐이다. 내가 어머니이지만, 또 그것을 부정하면서 자기 분열과 죄책감을 반복하는 건, 나(여성)의 언어와 삶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얄팍하게 배운 지식만으로는 나 또한 모성을 둘러싼 제도적 관행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육아를 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육아가 24시간 지속적인 육체적, 정신적인 노동이면서 동시에 ‘아웃소싱’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남편과 나는 역할 분담을 통해 균형점을 찾으려 했지만, ‘기울어진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로 남녀가 모성을 함께 공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온종일 인터넷을 뒤지면서 모유 슈유, 젖몸살, 수유 간격, 아이를 재우고 먹이는 것 등 각종 육아 정보를 찾아보면서 이렇게 많은 전문가가 왜 음지에 숨어 있는지 분개하곤 했다. 신화화된 ‘어머니’ 서사 너머에 모성을 이루는 실제 육아와 돌봄은 일상적으로 중요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무시되어왔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경험(나혜석)”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이다.

2.

나는 지금 유학하는 남편, 두 돌 지난 아이와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다. 아이를 환대하는 사회적 제도에 반쯤 걸쳐 있다 보니 한국 사회가 조금 더 투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이곳에선 평일 오후 놀이터에 아이와 함께 있는 아빠들이 낯설지 않고, 유모차를 끌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곳이 카페건 식당이건 미술관이건, 누구도 아이가 내는 울음소리를 ‘소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아이와 엄마 모두 ‘음지’에 숨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런 면에서 아이를 낳으면 더 보수화된다는 말은 반은 틀리고 반은 맞다. 소속 없이 전시기획을 해오던 나와 십 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그만둔 남편은 아이를 통해 더 큰 용기를 얻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한국 사회에서 ‘함께’ 아이를 기르는 것이 불가능할 거라는 현실적인 계산 또한 했었다. 한국에서 경험한 출산 과정은 관료화되어 있었고, 양육에 필요한 사회적인 도움은 희소한 채 육아는 시장화된 방식으로 개개인이 관리하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의 핵가족 자본주의 안에서 육아를 시장/제도에 맡기지 않고 아이를 돌봐줄 마을/관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돌봄 노동 역시 경제적 효율성에 맞춰져 있다 보니, 육아와 가사를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떠넘기면서도 같은 여성들 간의 사회적 경제적 ‘차이’에 따른 차별과 경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회(제도)로의 이동이라는, 나와 남편의 이 ‘보수적인’ 선택은 현명했었던 걸까? 의식주를 둘러싼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이국살이의 어려움은 차치하고, 서구에서 아시아 여성이자 엄마로 살아가는 것 역시 결코 쉽지는 않다. 한국에서 ‘맘충’으로 호명되는 것만큼이나 외국인 ‘엄마’로 겪게 되는 차별과 무시는 나의 개인성을 손쉽게 지워버린다. 타자(他者)가 되는 경험 속에서 나 역시 누군가를 쉽게 타자화하기도 했다. 난생 처음으로 길바닥에서 우악스럽게 화를 내고 항의하면서 내 안의 편견과 분노가 날 것으로 제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또 다른 분열과 마주한다. 삶과 언어는 여전히 불일치하고, 사유가 내 행위에 선행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통렬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3.

얼마 전부터 아이는 프리스쿨pre-school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태어난 지 두 해를 넘긴,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를 타국의 제도에 맡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거의 무상에 가까운 제도적 혜택을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아이는 언어도 생김도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어쩌면 더 크게 우는 것처럼 보였다. 가기 싫다고 울부짖는 아이를 떼어 내는 기분은, 내 몸에서 열달을 품고 나온 아이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양가적이다. 온전한 내 시간을 회복한 반가움과 내 통제 밖에 놓인 아이에 대한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이다. 이젠 아이를 ‘완벽히’ 벗어난 삶 역시 상상할 수가 없다. 아이와 서둘러 인사하고 학교 앞에서 더치, 몽골, 방글라데시, 터키, 인도, 중국 여성들이 영어, 더치, 힌디, 다양한 언어를 섞어가면서 대화를 나누는 풍경은 퍽 재미있다. 이민자가 많은 암스테르담에서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엄마들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대화가 매끄럽지는 않지만 의미는 언제나 공유된다. 서구도 내부는 이질적이고 성평등 사회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아이’는 그 이질성에서 비롯한 이해의 빈틈을 메꾼다.

여기 이렇게 내 삶의 위치가 이동한 것처럼, 한때 내가 떠올렸던 ‘미술’의 모양 역시 조금씩 변하는 중이다. 생활과 육아로 밀도 높은 일상을 보내다 보면, 현실이 너무 또렷해져서 관념적인 언어들은 겉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출산하고 백일도 안 돼 힘들게 마감한 원고에서부터 출국 직전까지 계속한 미술 활동이, 갈라진 두 세계를 가까스로 연결해줌으로써 나를 안심시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게 아이는 삶과 언어 사이에 틈을 내고, 나는 다시 삶과 언어로써 그 사이를 좁힌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 글을 쓰는 계기 또한 그 분열을 통해서였다. 따라서 이 분열의 지속은 내가 조각 내 부숴버려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하는 삶의 동력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길 위에서 타인의 낯선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아이와 함께할 때였다. 아이를 키우는 근원적인 불안도, 이방인의 낯선 감각도, 맥락을 다시 써야 하는 막막함 모두, 다양한 갈래로 쪼개진 지금의 내 현실이다. 그리고 아이를 통해 나는 계속해서 타자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여전히 문밖을 나설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나에게 페미니스트 앤 스니토우(A. Snitow)의 이 말이 큰 위로가 된다. “분열 속의 긴장은 우리의 적이 되기는 커녕, 매우 다른 여성들을 연결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이 글은 단행본 <자아 예술가 엄마>(발행: 팩토리, 2019)에 실렸습니다.

Next
Next

돌보는 시간: 미술관과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관계 맺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