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는 시간: 미술관과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관계 맺기”
돌봄을 위한 시간은 대부분 장소에 종속된다. 아이가 더 어렸을 때 아침에 일어나 어디서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는 건, 익숙한 내 일과였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대형마트, 키즈카페 등 상업 시설과 놀이터를 왕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한국 사회에서의 ‘돌보는 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고민은 내가 돌이 갓 지난 아이와 함께 지냈던 암스테르담에서의 경험을 떠올릴 때마다 더욱 선명해지곤 했다. 그곳에는 분명 상업 공간만이 아닌 다른 선택지, 그러니까 미술관이 있었다. 대부분의 미술관이 대중교통으로 삼십 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장점과, 교통 약자를 배려한 시설은 내가 유모차를 끌고 그 공적공간으로 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내가 미술관을 단순히 하나의 시설이 아닌 한 사회가 마련한 제도적인 환대로 여기게끔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미술관은 어떨까? 여기서는 왜 이 선택지를 쉽사리 떠올릴 수 없을까. 나는 그 사실이 새삼 낯설고 부당하게 느껴졌다. 어린이-관람객과 함께 할 때 그곳이 내게 여전히 편안한 공간일 수 있을까? 노키즈존, 맘충 등 아이와 여성을 집단화 해 혐오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이와 함께 새로운 장소에 갈 때마다 긴장을 주었고, 수도권에 집중해 있는 문화시설의 접근성 역시 큰 장벽으로 다가왔다. 더불어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미술관 제도의 엘리트주의는, 그곳이 과연 소수자 관람객을 환대할 의지가 지금껏 있어왔는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민 속에서, 미술관이 ‘돌봄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제언은 일종의 정치적인 선언이다. 그렇게 이 연구는 내게 미술관의 고정된 역할 ‘바깥’을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본 연구는 성별화된 사적 돌봄의 문제를 공적인 공간에 분배하고, 미술관이 독점한 권위를 여러 관계 속에서 나눌 것을 제안하고 싶었다.
한국 사회의 제도적 주기에 맞추다 보면, 기획자가 하나의 주제에 공들여 천착하기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지난 일 년간 동료들과 함께 단일한 주제 아래에 축적한 자료들을 돌아보면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해외 사례 분석이 미진한 점과, 예산의 제약으로 관객들의 목소리가 담긴 경험 연구를 시도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이 연구가, 동시대 미술관이 어린이 관람객에게 갖는 관심이 ㅡ단지 오늘날 새로운 소비자로서의 관람객을 확보하기 위한 다급함이 아닌ㅡ 더 많은 관계에 대한 모색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작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길 바란다.
*이 글은 2021년 아르코 공공예술사업 연구지원형 <돌보는 시간: 미술관과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관계 맺기 연구> (참여 연구원: 이슬비, 윤주희, 조은비)의 연구자료집의 후기로 작성했다.
https://url.kr/p785dt : 연구자료집 전문 다운로드
목차
라운드테이블 1) 모두를 돌보는 미술관: 정책 연구 – 박소현
라운드테이블 2) 미술관과 어린이: 배움의 장소 – 최성희, 이한범
라운드테이블 3) 미술관과 어린이: 현장 연구 – 황지영, 유민경
라운드테이블 4) 어린이와 현대미술 – 국동완, 김용관
퍼포먼스 〈어린이 예술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