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시작하는 큐레이팅”
*이 글은 월간미술 2022. 12월호 ‘큐레이터스 보이스’에 실렸다.
2017년 내가 기획했던 《모빌》(두산갤러리 서울)은 공동체의 (불)가능성에 대해 ‘모빌’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시각화한 전시였다. 여기서 ‘모빌’은 제가끔 고유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상호작용하는 개별적 조각들의 역동을 표상하고, 따라서 전시는 오늘날 공동체의 형식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그렇게 모빌을 전시장에 띄워 둔 채 내 개인의 시간은 출산과 육아라는 변화 속에서 5년이 흘렀다. 그 사이, 국가 간 이주의 경험과 더불어 팬데믹이 있었고, 공동체에 대한 나의 감각은 변화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기획한 전시 《우연을 기대》(디피, 2022.10.18-11.19)는, 모빌이라는 총체적 형상으로부터 그 각각의 세부적 움직임으로 옮아간 내 시선의 이동을 반영한다.
여름 전후로 “단계적 일상 회복”이란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은 단지 일종의 행동 강령처럼 들릴 뿐 기실 무엇을 어떻게 해얄지는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에게 ‘회복’할 일상이 과연 존재하는가. 사실상 노동과 환경, 모든 영역이 회복 불가능한 방식으로 착취되는 상황에서 일상의 회복이란 말은 기이하고 기만적이다. 전시 서문에 언급한, Ctrl+Z와 같은 디지털 복구 감각에서부터 멸종된 매머드를 복원시켜 기후 위기를 막겠다는 “매머드 복원 프로젝트”를 비롯해, 회복을 향한 인간의 의지는 무엇이건 “복구 가능”하다는 인식에 기반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백적인 논리의 폭력은, 근대를 이끌어온 선형적인 발전 서사에 기초한다.
이 전시는 그 서사에 반응하고 반발하면서 진보와 회복이라는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의심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전시는, 사회적 현실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질문하고자 했다. 즉, 나는 현재적 불가능성에 냉소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긍정하지 않을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일단의 임기응변은 ‘우연성 contingency’이었다. 구체적으로, 나와 이 전시에 있어 이 개념은 외적인 통제 불가능성보다는 내적인 그 수용 방식에 방점을 찍는다. 세계의 우연성에 대한 적극적 이해에 앞서, 나는 그 이해에 기초한 행동에 무게를 두고자 했다. 즉, 나는 우연적 현실에 우리를 내맡기자고 권하기보단 그로 인한 우발적인 개별 상황들에 최선으로 대처하길 청하고자 했다.
한편, 이러한 문제의식은 또한 미술/전시의 맥락 안에서 전시장에 놓인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의 태도, 관객성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나는 전시 연계 프로그램 ‘크리틱 라운드업’ (전시 홈페이지 www.addingpages.com에서 김얼터, 윤원화, 이여로, 이연숙의 전시 비평문을 확인할 수 있다)을 기획해, 비평가로 활동하는 네 명의 독자를 초대했다. 전시 비평-리뷰라는 전시 종료 이후의 제도적인 의례를 전시 한 가운데 위치시킴으로써 이를 둘러싼 다양한 ‘시선’을 열어 두고자 한 것이다. 이여로는 ‘우연’을 관객이 주체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방점을 두었고, 김얼터는 전시기획과 작업의 관계성에서 생겨날 수 있는 불일치를 글에 담았다. 윤원화는 이미지에 주석을 달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 즉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 작동하는 권력의 문제를 언급했다. 이연숙은 우연에 기댄다는 이 전시의 태도를 한계로 지적하면서 이에 내재된 자유주의를 비판했다.
나 또한 ‘우연성’이라는 접근법의 한계를 그 시작부터 의식해왔다. 이는 현재의 질문에 대한 임기응변인 만큼 임시적인 답변이다. 그러니 그 임시성이 전시라는 시공간 안에서 얼마나 선명해질 수 있을까. 허나, 하나의 전시가 단지 존재하는 담론/텍스트 (가령, 이 전시가 영향 받은 리처드 로티의 책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면, 이연숙의 비판은 비평을 위한 예측 가능한 해석은 아니었을지 의구심이 든다. 더불어 본 전시의 주제어는, ‘우연’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어진 동시대 개인의 체념적 정서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본 전시에서의 우연은 결코 회의주의적 태도가 아니었다는 점을 명시하고 싶다.
외려 전시를 만드는 과정 속에 나는, 우연을 둘러싼 모호함과 규정 불가능성이 전시의 질문을 계속해서 갱신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즉 이와 같은 우연적 역동은, 지속적인 모색에 가깝다는 면에서 회의나 체념과는 지속적으로 거리를 둔다. 실상 ‘우연’은 표현하려면 할수록 그 주제와 어긋나게 된다는, 그러니까 우연은 전시/작업에서 명시적으로 구현될 수 없다는 그 아이러니는, 아이러니하게도 계속된 질문을 생산해낸다. 바로 그 지점 때문에 더욱이 나는 전시에 특정한 방향성을 제시하기보단 느슨한 테마 띄워두고, 그 뉘앙스를 제가끔 한껏 남겨두는 것을 큐레이팅의 태도로 삼고자 했다.
분명 나에게 있어 전시기획은 사회적 발언을 위한 장치로 기능하곤 하지만, 내가 던진 질문과 주제에 ‘매끄러운’ 맥락을 만들고자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나의 태도는 그러한 방식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관객에 대한 질문과 다시 연결된다. 다시 말해,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주체로서의 나의 자리를 변위했을 때 열릴 가능성을 나는 믿어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저자로서의 내 자리는 아무래도 비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본 한계는 관객성이 아닌 저자성에 있다. 그러니까 큐레이팅은 관객들이 기획자가 ‘제시’한 방식으로 전시를 보게끔 구체적인 경로를 설정해(놓아)야하는 걸까? 나아가 그 의미 생산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전시가 그 테마로써 스스로를 구현하지 못하는 자기모순이 발생할 때, 그 전시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작품이 메시지를 던지지 못하는 상황은 또 어떤가. 전시에서 의미는 어떻게 발생하고, 미술적 경험과 감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요컨대, 단지 필연의 반대로서의 ‘우연’(accident)이 아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우연’(contingency), 그 ‘우발성’에 방점을 둔 이 기획의 고민이 위에 열거한 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큐레이팅은 선행 담론에 바탕은 둔 기획이 아닌, 외적인 우발성에 대한 내적인 대응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 전시의 고민 역시, 작가와 기획자, 비평가 그리고 관객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감 그 하나로 공동의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관한 의구에 매여있다. 그리고 ‘오로지 우연을 기대’한다는 건 주체들의 행위자성을 끌어내려는 적극적인 청유이다. 장서영의 영상작품 〈오르페우스 후굴 시퀀스〉이 전시 주제와 합치하면서도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드러낸다고 해석한 김얼터의 비평처럼, 때때로 작업은 기획과의 불일치를 통해 전시의 의미를 생산하기도 한다. (시린 세노의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신작으로 이뤄진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내가 느낀 기대와 조바심, 그리고 작가와 맺은 관계의 역동은 그 자체로 우연이었다. 더불어 전시 주제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조차 타자성을 통해 다시 읽기가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우연을 둘러싼 질문은 부메랑처럼 다시 내게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