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플랫폼 경험에 관한 다섯 편의 일기”
처음 이 글-“온라인 플랫폼 경험에 관한 일기”-을 청탁 받았을 때 나는 관음과 노출에 대해 생각했다. 남의 일기를 읽는다는 것과 남에게 읽힐 일기를 쓴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이 두 가지 욕구는 잘 어울리는 한쌍 같으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배반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다시 말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것은 만족과 함께 실망을 동반할지 모른다. 원치 않는 것을 원한다는, 그 감정의 토대를 뒤흔든다는 것.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제안에 응한 것은, ‘온라인 미술 플랫폼’이라는 장치가 그 양가성과 조응하고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반향은 내가 집이라는 공간으로부터 감지하는 고유한 진동과도 잘 어우러질 듯싶었다. 따라서 이 일기의 내용은 독자가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를 수도 있고, 어쩌면 심지어 무관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 나는 이 글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글이라고 믿는다. 제안이 없었으면 쓰이지 않았을, 공개될 일기라는 모순이 이 글의 변치않는 요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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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별 수 없이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출산 이후로 지난 몇 년 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네덜란드에서 지내는 2년의 시간 동안, 이국의 보육제도에 기대지 않은 채 오롯이 아기를 돌본다는 것은 곧 이동과 행위의 제약을 의미했다. 아이와 단 둘이 있을 땐 ‘우리’와 저 밖의 세상은 완벽히 분리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매 순간 돌봄이 필요한 아기를 위해 집은 놀이공간, 일터와 연구실, 만남의 장소 등으로 그 쓰임이 다양해졌다. 어쩌면 그때 나는 제약으로부터 어떤 가능성을 찾으려 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팬데믹 직후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또다른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매트리스 사이로 침범하는 아이의 소음은 종종 이웃 간에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맘충, 노키즈존 등 아이와 여성을 집단화하는 혐오와 적대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외부 활동을 위축시켰다. 집은 애초부터 그저 대피소일 따름이었다. 긴급보육, 비대면 수업 등으로 전환된 교육과정은 아이들을 집으로 ‘가두는’ 일을 반복하지만, 정작 집 안에서 “대면을 피할 공간”은 없다. 닫힌 공간 속에서 실상 불가능한 비대면은, 공적인 영역을 기준으로 마련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아이러니를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몸과 몸이 끊임없이 부딪치고 맞닿는 양육에 물리적 거리두기란 불가능하다. 아이와 함께 가던 공공 도서관은 방역 조치를 이유로 대출만을 허용하고, 학교 운동장과 단지 내 놀이터 이용은 제한되었다. 공공 미술관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예약 운영을 하지만, 아이들은 애당초 환영 받는 관객이 아니었다. “집에 있으라”는 말이 공허한 것은 원래 이들에게 온전히 허락된 공간은 ‘집’뿐인 탓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 사회가 팬데믹 이후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 전환적 상상력을 지금, 여기의 공간-집에서부터 찾길 바란다. 집 안의 일과 집 밖의 쓰임은 분배되어야 하기에. 그리고 미술관 역시 그 분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팬데믹 이후 미술관들은 제가끔 자신의 새로운 (혹은 마땅히 했었어야만 하는) 역할을 다급히 상상하고 있다. 이 플랫폼 역시 그 상상의 구현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일기는, 내가 그 상상 속의 누군가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향한 내 일상의 응답이다.
2021. 9. 9.
오늘 오후 어린이집에서 코로나 밀접 접촉자로 분류되어 자가 격리를 해야한단 연락을 받았다. 아이를 곧바로 하원시키고 나는 네 번째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이제부터 2주간 아이와 함께 꼼짝없이 집에 있어야할 테다. 육아는 내 시간감각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다. 양육의 일상이란 끊임없는 ‘반복의 반복’이라 불과 어제의 기억조차 쉽게 증발해버린다. 아이에겐 되돌릴 과거나 막연한 미래보단 ‘지금’이 더 중요한 탓일까. 우리는 서로와 함께 서로에 기대어 오늘만 산다. 그리고 어느날 문득, 성큼 자란 아이의 낯선 모습에서 시간은 가시화된다. 그렇게 어른과 아이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작년 네덜란드에서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네살배기는 영문도 모른 채 격리되었지만, 불과 일년 사이 아이는 이 상황을 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훌쩍 커버렸다. 분명한 목소리로 코로나가 빨리 사라졌으면 한다는 아이의 말엔 진심이 담겨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이가 겪게 될 답답함보단 당장 내 일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계획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선 아이의 협조와 남편과의 역할 분담이 중요하다. 앞으로 쌓이게 될 피로에 벌써부터 고단해진다.
물론 팬데믹 이후로 일상화된 비대면 시스템이 주로 집에서 일하는 내 업무에 큰 불편을 주는 것 같진 않다. 돌이켜보면 귀국 후 지난 일 년여 간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대부분의 업무는 주로 온라인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때로는 ‘사회적 거리두기’란 명분으로, 비대면의 편의성이 대면 만남을 자연스럽게 대체하기도 했다. 어느 문화재단의 심의 평가 역시 온라인으로 이뤄졌고, 평가가 종료되기까지 나는 실무자와 단 한번의 만남을 가졌을 뿐이었다. 작가성이나 작품을 둘러싼 (수치화가 어려운) 추상적인 판단은 새로운 기술과 제도에 의해 매끄럽게 합리화된다. 그리고 이 다양한 가상 회로망 속에서 내 삶은 안전하게 유지되는 듯 보였다.
여기 갇혀 있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가늠해본다. 모르겠다. 아니, 너무 잘 알겠다. 좁은 아파트 공간에서 돌봄의 ‘소란스러움’을 견뎌야 한다는 것. 게다가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돌봄을 나누기 위한 ‘돌봄노동 시스템’이 연쇄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창밖에서는 밤낮 가릴 것 없이 택배 차량의 상하차 소음이 들려온다. 아파트 복도를 구르는 카트의 요란한 쇳소리와 분리수거 폐기물을 치우는 대형 화물차의 기계음, 팬데믹 이후로 늘어난 리모델링 공사음까지. 어떤 돌봄은 그 소란스러움으로 스스로를 가시화한다. 그러므로 코로나가 일시적으로 시장을 멈춰 세웠다 하더라도 이 시스템 아래 완벽한 멈춤은 없다. 플랫폼 경제가 이제 인간의 신체와 사고 행위 전 영역에 걸쳐 다양한 대행 서비스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식사, 쇼핑, 뉴스, 청소, 세탁, 영화, 음악, 미술작품 등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나를 대신해 내가 원하는 것을 큐레이션하고, -당신이 지불 능력만 있다면- 무엇이든 대여하고 대리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문득 나는 궁금해진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일까? 설령 그럴 수 있다해도 그럴 기회가 주어질까? 모니터 화면 안에 잘 배열된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격리된 내 처지가 그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현실과 실물로부터 유리된 채 ‘우리’는 절차화된 순환경제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게 2주 간 나는 여럿의 표적이자 실적이 될 것이다.
2021. 9. 24.
워치앤칠에서 금요일마다 업데이트 되는 작품 공개 알림 메일이 왔지만, 벌써 두 번째 메일을 지나쳤다. 한번은 성가신 메일들 탓에 무심코 지나쳤고, 그 다음 번에는 자가 격리 해제 후 지연된 일상 탓에 확인할 겨를 없이 바빴다. 하지만 그런 상황 때문이 아니더라도, 플랫폼에 관한 글을 좀처럼 쓰기가 어렵다. “제도의 제안에 따른 제도적 경험”에 관한 글이, 왜 그 경험 자체를 서사화하는 데 실패하는가. 나는 플랫폼 속 영상을 관람하고 일기를 쓰면서도, 어쩐지 거기서 본 작품의 내용이나 플랫폼의 인터페이스에 관해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이는 플랫폼을 구성하는 시스템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까 이 실패의 원인에는 나 자신의 몫 또한 있을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왜 나는 이 감상에 몰입하지 못하는가.
분명 누군가는 이 플랫폼이 가진 장점들을 발견하고 확장시키며 작업들을 향유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나 내게 이 생각은 결국 미술관이라는 제도에 대해 재고하게끔 할 따름이다. 온라인 플랫폼의 기술적인 가능성과 제약이, 특정한 개인-가령, 돌봄 노동자 또는 예술 감상에 대한 동기를 충분히 부여받지 못한 이들-을 암묵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내게 어떤 작업이나 웹사이트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지난 자가격리 기간 동안 작성한 메모로 오늘의 일기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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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는 모두 속수무책이다. 유예된 약속과 기약 없는 만남, 중단된 일상과 취소된 계획 앞에서 시간은 무력해진다. 지금 여기 가능한 것은, 결국 기다리는 일 뿐이다. 기실 우리는 그저 현재로부터 벗어나길 바랄 따름이다. 그렇게 비-현재가 현재를 말소시키고 있다. 우리는 지금을 살지 못한다. 미래를 향한 선형적인 시간배치는 근대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뤘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명료한 시점들은 시간을 말끔하게 재단하고, 그 위에 간격과 주기라는 친절한 범례를 새겼다. 가령 우리는 현재를 준거로 과거를 돌이켜보거나 미래를 내다보았다. 즉, 미래를 기약하는 이 위계적인 시간성은, 현재를 사는 원동력이자 다가올 시간을 대비하는 믿음직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진보의 환상은 ‘어제' 보다 나은 ‘내일'을 상상케 했다. 예컨대, 4년마다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어김없이 기록을 갱신하던, 그 환희의 순간들을 분명 쉽사리 잊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삶은 어떠한가. 균질한 간격으로 물결치던 시간의 파동이 어느새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과거의 규범과 제도로부터 울려 퍼지던 리듬은 대중없이 깨지고, 그 위계와 작위성을 뒤흔드는 진동 속에서 익숙한 템포는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따라서 불확실해진 것은 결국, 애초에 아직 오지 않은 하나의 ‘미래'가 아니라, 이를 대비하고 또 맞이하던 그 수많은 관성적인 ‘현재’들이다.
이 속수무책 속에서 제도의 권위는 ‘거리두기'의 아이러니만큼 오히려 더 강력해보인다. 과학의 견고한 체계 아래 이성과 합리를 담지하는 기술만능주의, 혹은 그 ‘예측'의 패러다임이 근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개인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를 상실한 개인들은 불안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내려놓고 제도와 권위에 의지하고, 미래에 대한 책임을 그에 전가한다. 하지만 제도나 권위는 실상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들은 개인에게 그 전가의 책임을 물을 따름이다. 재작년 겨울, 공기업의 부당한 고용구조를 규탄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의 젊은 아내는 광화문에 분향소를 세우고 고인의 운구차를 세웠고, 이는 이내 “방역"을 이유로 강제 철거되었다. 나는 그가 실로 “공공의 안전"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억울함에 대한 관용이 또 다른 “불법집회”를 용인하는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는 공권력의 설명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그럴싸한 말들에 반박할 근거를 도무지 마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와 주체성을 제한하는 공적인 힘에 대응할 마땅한 언어가 날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개인의 왜소화를 합리화하고 오히려 긍정하게끔 만드는 이 현실의 역설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공표된 기준은 타자와의 거리, “사회적 거리두기”를 명시하지만, 실상 이제 그 누구도 타인과 얼마만큼의 ‘간격'을 가지고 만나야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모든 상황은 예외적이고, 그 예외상태에 대해 우리 중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2021. 9. 30.
아이가 낮잠을 푹 잔 탓일까. 좀처럼 잠 못드는 아이를 토닥이면서 나는 아이를 재우고 나서 밤에 볼 영상작품의 목록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아이 손이 내 손을 꽉 쥐고 놓아주질 않는 탓에, 생각을 더이상 이어가기 어렵다. 아이는 잠들기 직전이나 불안할 때 내 손가락을 쥐고 그 끝을 제 손가락으로 튕기는 버릇이 있다. 애착과 안정을 위한 습관. 그리고 그 습관은 전염성이 강해 이젠 나도 그 버릇이 종종 나오곤 한다. 아이를 토닥이기 시작한지 한 시간이 넘어가자 슬슬 속에서부터 짜증이 올라온다. 결국 나는 아이를 재우는 것을 포기하고 남편과 교대했다. 그리고 인내를 쏟아버린 수면과 비수면의 경계에서 간신히 탈출해 다시 온라인에 연결된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 나는 신생아를 키우면서 수유 텀, 수면의식, 수면패턴 등 낯선 전문 용어들을 알게 되었다. 과거엔 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웠던 걸까. 요즘 양육자들이 자주하는 소리다. 인류의 역사만큼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의 수가 많다한들, 동시대 삶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개개인이 경험하는 육아는 놀라움의 항구적인 연속이다. 최근 정부가 돌봄로봇 4종을 개발한단 기사를 읽고 실소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는 돌봄을 직접해본 사람에 의한 발상이 아닐 것일 뿐더러 애초에 그 의도가 불순하다. 다시 말해 이 시도는, 돌봄을 여성의 타고난 자질인 것처럼 성별화해온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을 저평가할 뿐만 아니라 기계 기술에 의해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독일로 이주한 케냐 출신 난민 인권 운동가 미미의 생전 인터뷰를 읽어보면, 그는 자신이 독일 정부의 난민 귀화 정책에 따라 제 의사와는 무관하게 노인병원의 간호사로 양성되었다고 밝힌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고통스럽게 기억한다. 아프리카에서 노인은 자발적인 돌봄과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독일의 노인병원에서는 노인을 “공장의 조립라인”에 있는 부품처럼 다뤘고, “환자들은 상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게 공동체의 부재를 대체하는 선진국의 의료 시스템은 이질적인 문화 충격이었고, 이를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결국 독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이처럼 소위 ‘문명화’된 국가의 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상기해볼 때, 돌봄 로봇이라는 국가정책적 해법은 어찌보면 인간에게 남아 있는 일말의 개인성마저 박탈하고 통제하려는 기술-자본의 교묘한 수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돌봄’의 경험은 매순간의 상호성에 기반한다. 아이의 손가락과 내 손 끝이 만나, 우리는 서로를 돌본다. 인간의 취약성과 늙음, 의존성과 관계, 공감 능력과 맥락이 제도화될 수 있다는 미래주의적 낙관은 현재를 겁박하면서 제도의 ‘환상’을 강요한다. 돌봄은 제도나 기술 등, 절차화된 방식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의 가치로 회복되어야 한다.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잠에서 덜 깬 아이가 울면서 엄마를 찾는다.
2021. 10. 1
엘레베이터에 또다른 층에서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한단 안내문이 붙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집에 오래 더 잘 머물기 위해서, 부수고 짓는 일을 반복한다. 팬데믹이 불러온 가장 큰 부작용은 어쩌면 그 원인을 성찰할 기회마저 앗아간다는 것일지 모른다. 시끄러운 소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는 일거리를 들고 나와 워치앤칠 오프라인 전시를 본 뒤 카페에 들어가 일을 했다. 서울에 부재했던 것이 불과 3년인데, 그 사이 익숙한 동네와 거리는 제 모습을 완전히 바꿨다. 주택가 골목 곳곳에 카페가 생겼고, 늘어난 카페 수 만큼이나 고정된 일터 없이 임시적으로 일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넷플릭스를 감상하고 있는 젊은 연인들. 영화를 보면서도 서로를 끊임없이 촬영하는 그들을 보면서, 문득 이들에게 미술관이 제시한 온라인 플랫폼은 어떻게 다가올까, 궁금해졌다.
미디어를 경유한 동시대 예술 환경은 전시/작품 뿐만 아니라, 관객성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어쩌면 새로운 세대의 ‘관객’에게 오프라인의 전시는 온라인에서 본 것, 을 단지 재확인하거나 현장에서 본 것을 온라인 상에 재배열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미술관 안내문보다 더 자세하게 전시를 소개하고 있는 어느 블로거의 전시 후기를 읽다보니, 전시를 다시 본 것 같단 착각에 빠져든다. 나는 워치앤칠의 온라인 플랫폼과 그에 조응하는 오프라인 전시를 보며 느낀 어떤 동어반복에 대해 생각하면서 새삼 현재 전시가 처한 양가성을 떠올려 본다.
오늘날 전시는 하나의 유기적 개체로 존재하며 그 안에 설치된 작업들은 그 장기로서 서로 작용하고 보조하고 길항하고 신호를 주고받는다. 그럼으로써, 생동하는 작업의 성질과 상태는 전시를 얼마간 ‘살아’있게 한다. 그리고 이 짐승은 분명 관객을 먹고 산다. 관객은 전시장 내부로 걸어들어가 그 안을 순환하며 작업에 의해 소화되고 흡수되며 궁극적으로 서로에게 변화를 준다. 이 화이트 큐브라는 종의 피부는 당연히 대개 백색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관객들이 스마트폰을 쥐고 소셜미디어 계정에 늘 접속되어 있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화이트 큐브는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 맹렬한 구토는 단지 관객을 전시장 내부에서 온라인 공간으로 뱉어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장기를 가죽 바깥으로 내놓게 했다. 이토 준지의 어떤 만화와 같이 겉과 속이 뒤집혔다. 전시의 장기(작업)는 제가끔 절단되어 흰 피부 바깥 온라인 공간에 그야말로 ‘전시’되고 ‘유통’, ‘판매’된다. 그러나 더 두렵고 소름끼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짐승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이 텅 빈 화이트 큐브가 여전히 살아 꿈틀거린다는 것.
이는 뒤집어 입을 수 있는 옷, ’리버서블’(reversible)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실용적인 복식은 한 벌의 옷을 두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입을 수 있게 한다. 하나의 동일한 실루엣을 지닌 두 가지 무늬의 옷. 이 안감과 겉감의 위치 전환은 드라마틱하다. 왜냐하면 리버서블 재킷은 그것을 뒤집기 전에는 그 속(혹은 겉)이 어떤 표면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환은 몇몇의 ‘드라마’를 겪으며 그 효과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더이상 속(혹은 겉)이 궁금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전시장 바깥으로 토해져나온 작업은 철저히 이미지 자본적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세속화된다.
벤야민이 지적한, 의례 이후 예술이 아우라를 상실하는 것처럼 화이트 큐브의 가죽 바깥으로 토해져 나온 작업은 본래의 생물성을 잃는다. 적어도 그런 듯이 보인다. 이때 제도와 관객은 다시 작업을 화이트 큐브의 입 속으로 밀어넣어 이를 되살려놓곤 한다. 리버서블. 다시 뒤집힌다. 아우라/유기성을 가지지 않은 예술을 그들 또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의 작업은 '토끼의 간'처럼 흰 가죽을 수시로 뒤집으며 겉과 속을 왕복한다. 이는 온라인 공간이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여닫는 것을 연상시킨다. 전시라는 미적인 짐승은, 소셜 미디어에 제 은밀한 내면을 강탈 당했다가 다시 돌려받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심미적 아우라와 자본적 세속성 사이의 환율에 따라 쉼없는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 속이 텅 빈 흰 피부의 짐승은, 주지하듯 오늘날 제도 미술/전시가 처한 상황을 은유한다. 동시대 미디어 플랫폼을 경유한 안전한 피드의 감각은, 때로 실제 전시 경험을 충족하며 현실의 경험을 대체하거나 심지어 변형시킨다. 요컨대 팬데믹 이후 전시는 왜 여전히 지속 가능하며, 작품은 왜 전시장으로 돌아와 관객과 마주하는가? 작업들은 결국 물리적 공간으로 회귀하여, 동시대 미술/전시/자본이 개념이나 상품성으로 포착하지 못하는 추상에 제 몸을 가린다.
2021. 10. 10
지난 여름에 이사 온 이 집은, 대규모 개발로 세워진 신축 아파트 단지에 인접한 구축 아파트이다. 우스갯소리로 신축의 인프라를 덩달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편의성이 있지만, 사실 동네에서 아이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개발이 ‘덜’ 된 건너편의 시장 골목이다. 아이와 함께 구립 어린이 도서관에 가기 위해선 재래시장 골목을 지나야 한다. 대규모 아파트들에 위압적으로 둘러쌓인 다가구 주택을 지나, 우린 골목 구석구석을 누빈다. 어릴적부터 봐온 아주 익숙한 골목길 풍경에서 어떤 낯선 정서가 느껴지는 건, 바로 옆 말끔한 신축 단지와의 대비에서 온 이물감 탓일 테다. 오늘날 부동산 자본은 서울 전역의 잉여공간을 샅샅이 찾아 기어코 식민화하고 만다. 이렇게 아파트의 환금성이 중산층의 주거 형식을 획일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발에 밀려난 골목길은 이제는 낡은 노스텔지어가 아닌 위태로운 욕망을 표상한다.
아이와 함께 이 길을 걸을 땐 그저 걷기만 해서는 안될 일이다. 무조건 ‘달리는’ 본능을 지닌 아이들에겐 서울은 위험한 도시다. ‘오토바이 온다! 빨리 벽으로 붙어!’ 나는 아이의 걸음을 확인하고 아이는 스스로를 돌본다. 오늘은 어느 길로 갈까? 비선형적으로 가지치는 길목 앞에서 우리의 오감도 함께 열린다. 어느 집에서 들리는 라디오 속 멜로디와 노인의 목소리, 아이들이 저마다 뛰어가는 모습. 갑자기 가게 앞을 청소하던 주인장의 시선이 아이에게 향하고, 쑥스러워진 아이가 제 얼굴을 가린다. 매일 걸어도 새로울 이 길을 아이는 유심히 바라보고 경험한다. 그에 반해 신축 아파트 단지는 각 시설물 간의 ‘경계’가 분명히 구획되어 있어 도보 이용이 쾌적하다. 잘 정돈된 단지 내 조경은 마치 분재와 같이 익숙한 ‘자연 풍경’을 눈 앞에 가져다 논다. 그러나 어쩐지 우리가 그것과 마주하기 위해 더 많은 제약에 노출된 것만 같다. 조경 시설물은 만지면 안되고 인공 폭포는 정해진 시간에만 물이 흘러 나온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단지 입구의 차단기 지나, 공동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끝내 도어락을 열어야 한다. 지나야 하는 ‘게이트’의 수는 꾸준히 상승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파트 단지 입구 곳곳에 놓인 “외부인 출입 금지” 팻말은 아이와 함께 보기에 낯뜨겁다. 입주민들의 공동 관리비로 유지되는 아파트의 조경과 시설물들을 ‘외부인’이 누려선 안될 일이란 것이다. 경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존재한다.
내가 지극히 주관적으로 어떤 풍경들을 대비시킨 것은, 오늘날 도시적 삶의 환경과 미술의 경험 방식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단 사실 때문이다. 팬데믹 이후, 미술제도 기관에서 미술에 대한 접근성을 빠르게 상상하면서 과거에 비해 그 편리성과 제도성을 갖추고 있는 한편, 오히려 그것에 진입하기 위한 단계 또한 상승하고 있다.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는 노력은 차라리 단순하지 않은가. 온라인 플랫폼에 접속하기 위해선 개인정보를 기입하고 ‘아이디’를 획득해야만 한다. 이후 각각의 작품에 접속하기까지는 몇 개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아마 그 마지막은 삼각형 모양의 플레이 버튼을 클릭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새삼스러운 작동방식은-마치 플랫폼 자본의 의도처럼-감상자의 소비 패턴과 취향을 세분화된 카테고리로 정교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우리가 작품과 만날 수 있는 그 ‘마주침’의 순간은 역설적으로 감소한다. 각각의 정해진 게이트를 통과한 내가 이웃을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난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 마주친 헤라르트 테르 보르흐의 <아이의 머리를 빗는 어머니>(1952-53)에는 엄마가 어린 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러나 미술관에서 이 평온한 실내 풍경화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분명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1665) 바로 왼편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명화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 둘러쌓여 바로 옆에 있는 이 작품은 제대로 보기 힘들 뿐더러, 관객들의 주의 깊은 눈길을 받기엔 아무래도 어려운 처지다. 나는 이런 배치가 꽤나 얄궂다고 생각하면서, 우연히 만난 이 외면 받은 작품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와 사진을 찍으려는 관객들로부터 비켜줄 수 있냐는 핀잔을 간간이 들어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넷플릭스식의 플랫폼에선 이러한 만남의 가능성마저 차단될 것이란 점에서, 아이의 머리를 빗는 어머니가 앞으로 맞게 될 운명은 더욱 가혹할지 모른다.
분명 관객이 제시된 ‘시스템’ 안에서만 미술을 경험하게 된다면 개별적인 맥락화의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가이던스에 따라서 콘텐츠에 도달하는 제도적인 길에 ‘옆’ 길이란 없다. 그리고 이 직선의 답답함은 플랫폼에서 작품을 보는 내 조건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에게 주어진 ‘스크롤’의 권능이 작품에 대한 무례일지 모른단 생각에도 불구하고, 나는 곧잘 원하는 시점으로 이동하기 위해 스크롤 바를 재차 끌어 당기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 스크롤의 감각에 익숙해져, 내가 시간을 적절하게 조정하고 있단 착각마저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스크린을 봐야만 하는 극장의 블랙박스가 아니라면, 나는 지나치게 산만한 관객이 되고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어느 한편으론 작가가 획정한 시간성을 깨뜨릴 수 있단 이 힘이 내게 모종의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건 작품의 온전한 감상이 온전히 내 책임 하에 있단 사실에서 비롯한 어떤 부담감이었다. 그 개별적인 시간의 흐름이 내 손끝에 달렸다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이 감정은 새로운 경험을 이끌기도 했다. 즉 그 아이러니한 자율성에도 불구하고, 제작자의 의도에 순순히 따르게끔 만드는 작품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항복선언이었다. ‘나는 스크롤을 반납한다.’ 게다가 한번으론 아쉬워 나는 그 작품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감상했고, 이는-제도가 끝내 틈입할 수 없는-작업이 가진 고유의 힘을 발견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여겨졌다. 이와 같이 온라인 플랫폼은 어떤 상황에 조건 지어진 어떤 시민에게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미술관의 온라인으로의 ‘이주’가 팬데믹에 대한 손쉬운 반응에 머물러선 곤란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안적인 접근은 미술관 제도가 예술가와 관객 그 사이의 어떤 긴장 관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미술관이 그 미래를 상상하는 데 있어, 그간 누락시키고 배제해왔던 것을 포괄하는 것이 최우선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어느 재벌 기업가가 사후 미술관에 기증한 소장품의 전시가 이 팬데믹 상황에서도 연일 흥행하고 있다는 작금의 사실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관람 예약은 이미 한 달 전에 마감되었고, 이는 한국 미술을 애호하는 잠재된 관객들을 새삼 발견하게 한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한 풍경 앞에서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어린이가 현대미술관에 가지 않으면 미술관은 망할까? 물론 안 망할 것이다. 미술관에 외국작가가 없다면 망할까? 아주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관에 이건희가 없으면 망할까? 아마도 망할 것이다. 이 문답은 우리가 지금부터 새롭게 상상할 미술관에 의해 ‘다시’ 쓰여야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누구이며 공통의 경험은 무엇인가. 누구여야 하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 이 일기에 서술된 사건들은 실제일 수도 또 허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별반 차이는 없을 것이다. 겪지 않은 것을 겪은 듯한 기분이 바로 내가 이 플랫폼에서 가장 온전하게 겪을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우리 집에서, 워치 앤 칠 우리 집에서, 워치 앤 칠 = Watch and chill: streaming art to your homes》(국립현대미술관, 2022) 전시 도록에 실렸다.
Five diary entries on on-line platform experiences
My first thoughts, when asked to write “a diary about my experiences of on-line platforms,” were of voyeurism and exposure. With regard to reading someone else’s diary, and writing a diary to be read to someone else. I see these two desires as a well-matched yet mutually treacherous pair. In other words, I wonder if showing people what they want to see brings a combination of satisfaction and disappointment. An undermining of the emotional foundation of wanting what you don’t want. The reason I accepted the proposal despite these risks was a hunch that the device of an “on-line art platform” corresponded with this ambivalence. It also seemed that this resonance would be well-suited to the unique affects that I felt in the space I call home. It follows that the content of this diary may be nothing like that desired by the reader, and may even seem irrelevant. But, as you know, I believe that was the inevitable fate of this text. Because its immutable core is the contradiction of a public diary, one that would never have been written if it had not been proposed by someone else.
*
When you’re asked to talk about your home, you inevitably find yourself looking around it. In the last few years, since giving birth to my child, I’ve spent most of my time at home. During the two years I spent in the Netherlands, I did nothing but look after my child without relying on the country’s foreign childcare system; this entailed limits to my movements and actions. When I and my child were alone together, it seemed as if “we” and the outside world were separated completely. Moreover, for my child, who needed looking after at every single moment, the home acquired a greater diversity of uses, from playground to workplace, research lab, and meeting venue. Perhaps, at the time, I was looking for some kind of possibility within these limits. But that was short-lived; straight after start of the pandemic, we returned to Korea and I was forced to feel yet another kind of frustration. Noise from my child, penetrating all the way through a thick mattress, caused occasional tension with our neighbors, while I found myself leaving home less often amid the hate and hostile social climate that lumped women and children together to produce labels like “mum-roach” and spaces like “kid-free zones.” From the start, our home was merely a place of refuge. The educational curriculum kept on “locking kids up” at home with measures like emergency home care and contactless classes, but within the home there was no way of avoiding contact. The effective impossibility of non-contact within a confined space merely highlighted the irony of social distancing, a notion based on the public realm. In childcare, with its endless physical contact, physical distancing was impossible. The public library where my child and I used to go now only allows borrowing, as part of COVID-19 prevention measures, while school grounds and the playground in our apartment complex are closed. Public art museums are operating reservation-based systems to ensure social distancing, but children were never particularly welcome there in the first place. The emptiness of the phrase “stay at home” lies in the fact that home was the only space completely permitted to them from the start. So if we want society to start thinking in different ways after the pandemic, I would like us to pursue these transformative imaginings in the space of here-and-now that is the home. Since we need to distribute work in the home and use outside the home. Art museums, too, bear some responsibility for this distribution. This platform[USER4] will also be one embodiment of our imaginings. The following diary entries, therefore, are daily answers to the question: Can I be considered by these imaginings as someone to take into account?
Thursday, September 9, 2021
This afternoon I got a message from the nursery that I had been classified as a close contact of a COVID-19 patient and had to quarantine at home. I fetched my child straight away and got my fourth COVID test. For the next two weeks, I’ll be stuck at home with my child. Childcare has completely changed my sense of time. Its daily routine is one of repeated repetition, so that memories as recent as yesterday’s are quick to evaporate. Perhaps it’s because, for kids, the present is more important than a past to look back on or a vague future. Together, we rely on each other alone, and live only for today. And the sudden sight, one day, of our rapidly grown and unfamiliar looking child, gives time visible form. Time thus flows differently for adults and children. Last year, when I returned from the Netherlands to Korea, my four-year-old was quarantined without even knowing it, but, in the space of barely a year, she has grown up so fast that she understands quarantine completely. When she pronounces clearly that she wishes COVID-19 would disappear quickly, she voice is full of sincerity. But now, I am more worried about my work than about the frustration my child is going to feel. If I am to get the work I have planned done, cooperation from my child and role division with my husband are important. The thought of the fatigue that is set to build up is already wearing me down.
Of course, the contactless systems that have become part of daily life since the start of the pandemic don’t seem to disrupt my work, which I generally do at home anyway, that much. Looking back, I’ve taken part in several projects in the year or so since returning to Korea, but most of that work has taken place on-line. Sometimes, the convenience of non-contact has naturally replaced in-person meetings under the pretext of social distancing. One cultural foundation conducted a judging process, and I only held one single meeting with a member of the foundation staff from beginning to end. Abstract judgments of artistic character and works (which are hard to quatify) are smoothly rationalized through new technologies and systems. And my life seemed to be safely continuing within these various virtual networks.
I try to weigh up the difference between confined here and not being so. I don’t know. No, I know only too well. About having to endure the noisiness of childcare in the space of a small apartment. Even more ironic is the way the series of “childcare labor systems” that come into operation to divide this caregiving. Outside our windows comes the sound of delivery vehicles being loaded and unloaded, day and night. We hear loud metallic sounds trolleys being wheeled down the corridor outside, the mechanical sounds of big trucks taking away the sorted garbage, and even sounds of renovation work, which have become more frequent since the pandemic began. Some childcare makes itself visible through its noisiness. So even if COVID temporary brought the market to a halt, there is no complete stopping under this system. Because the platform economy now supplies diverse proxy services in all human areas, from our bodies to our thoughts. From meals to shopping, news, cleaning, laundry, films, music, and artworks, it replaces me as curator of my own desires, telling me I can rent anything or have any service provided—as long as I can pay for it. Suddenly, I am curious. Are humans now beings that can make their own choices and decisions? And, even if they are, do they have opportunities to do so? Watching the works displayed so nicely on my monitor, it occurs to me that my own isolated situation is no different from theirs. Removed from reality and genuine objects, “we” constitute a proceduralized, circular economy. Thus, for the next two weeks, I am set to become a series of targets and results.
Friday, September 24, 2021
Every Friday, I get an email notification from Watch and Chill telling me about newly updated artworks. I’ve already missed two emails. One, I accidentally overlooked due to a load of other annoying emails, and the next time I didn’t have time to read it amid my daily schedule of postponed events following the quarantine. But, even if that wasn’t the reason, it’s hard for me to write about the platform. Why does a text about “institutional experiences in accordance with systems and proposals” fail to create a narrative about those experiences themselves? Even as I watch the videos on the platform and write my diary, it’s somehow hard for me to talk about the works I have seen there, or the platform interface. This doesn’t seem to be just a question of the system that makes up the platform. Perhaps the cause of this failure is, in part, my fault. Why, you might ask, am I not becoming absorbed in the appreciation of art?
Of course, some people might be able to discover and enlarge upon the platform’s good points as they enjoy the works on display. That’s more than likely. But personally, this thought just makes me end up reconsidering the art museum as an institution. The possibilities and limitations of an on-line platform may tacitly exclude certain individuals—those, for example, who work in caregiving or who lack the motivation to view art. Now, I have nothing to say about any artwork or website. Which leaves me with no choice but to replace today’s diary entry with some notes I made during my last home quarantine period.
*
Currently, we’re all at our wits’ ends. Faced with postponed appointments, meetings put off indefinitely, discontinued daily life and cancelled plans, time becomes impotent. Ultimately, the only possible thing now is waiting. To be honest, all we want is to escape reality. Thus, the non-present is erasing the present. We are unable to live. A linear arrangement of time, oriented toward the future, forms the basis of modern capitalism. The clearly-defined points of past, present and future made clean cuts in the cloth of time, superimposed with helpful legends of regular intervals and periods. We used the present, for example, as our reference point for looking back on the past and predicting the future. This hierarchical, future-promising temporality, then, was a motivation for living in the present, and a reliable condition for preparing for times to come. The fantasy of progress let us imagine a tomorrow that would be better than yesterday. I’ll never forget, for example, those moments of delight every four years when we transcended the limits of the human body, setting new records without fail. But what about life today? At some point, I stopped feeling the waves of time that had rolled in with such regularity. The rhythms that had echoed out from the norms and institutions of the past have broken into inconsistency, and familiar tempos have been swallowed up by the vibrations convulsing hierarchy and randomness. As a result, what has now lost its certainty is not the single future that was always yet to arrive, but the many inert presents that prepared for and greeted that future.
Amid this helplessness, the authority of the system actually appears as strong as the irony of “social distancing.” The technocracy that contains reason and rationality under the unshakable regime of science, or the paradigm of “prediction,” are controlling individuals in yet another way to modernity. Individuals who have lost the present surrender their own agency amid their uncertainty and depend on institutions and authority, passing on responsibility for the future to the latter. Yet institutions and authority effectively take responsibility for nothing. On the contrary: they merely hold individuals responsible for passing on the buck to them. In the winter of the year before last, the young wife of a man who had taken his own life in protest at the unfair employment structure of a publicly-owned company set up a memorial altar and a hearse for her late husband, but these were soon forcibly removed in the name of “COVID-19 prevention” measures. I really couldn’t understand how she was threatening “public safety.” Even less comprehensible was the explanation from the authorities that tolerating such injustice would in turn function as an excuse for other “illegal assemblies.” But the bigger problem was that I simply could not find any grounds for arguing against such plausible statements. How must we accept the fact that suitable language for responding to public power that limits the wills and autonomy of individuals is disappearing by the day? How must we regard the paradox of a reality that rationalizes the shrinking of the individual and actually makes it a positive thing? Officially proclaimed standards clearly call for “social distancing” from others, but no one is now actually sure how much of a “distance” they must keep when meeting others. All situations are exceptional, and no one is excepted from them.
Thursday, September 30, 2021
Maybe it’s because my child had a nap during the day. She is totally unable to get to sleep, and as I pat her, I think of the list of video works to watch tonight once I’ve put her to bed. But it’s hard to continue this train of thought as she grips my hand and refuses to let go.
When she is uneasy, just before falling asleep, she has a habit of grasping my fingers and flicking their ends with her fingers. It’s a habit of attachment and stability. And it’s a highly infectious habit, so I often catch myself doing it these days, too. When I’ve been patting her for more than an hour, I feel irritation slowly rising inside me. In the end, I give up trying to get her to sleep and my husband takes over. Barely escaping the boundary of exhausted patience between sleep and sleeplessness, I go on-line again.
After my child was born, I learned a host of specialist terms such as lactation period, sleep consciousness, and sleep patterns. How on earth did people use to raise kids? You often hear parents ask that these days. Child raising may be as old as history itself, but the personal experiences it brings every different individual within the circumstances of contemporary life and conditions is a perpetual series of surprises. That’s why, when I read a recent article on how the government is developing four types of childcare robots, I couldn’t help laughing. Not only could the idea not have come from anyone with actual experience of raising kids; it was based on dubious intentions from the start. It was problematic, in other words, both for undervaluing “women’s work” in a gender-based society that saw childcare as the innate gift of women, and for regarding that work as something that could be replaced by machine technology.
In an interview that I read, the late Mimi, a Kenyan refugee rights activist who had been living in Germany stated that she had been trained as a nurse in a geriatric hospital, regardless of her own wishes, in accordance with the German government’s refugee naturalization policies. In Africa, old people received voluntary care and respect from others, but in the German geriatric hospital they were traded as parts on “a factory assembly line,” and “patients were products: no more, no less.” To Mimi, the medical system of a developed country, standing in for absent communities, came as a culture shock. Unable to bear it, she ultimately fails to adapt to German society. When we recall this inhumanity of systems in “civilized” countries, the state policy-level solution of a childcare robot seems like no more than a piece of cunning techno-capitalist rhetoric aimed at stripping away the last drop of human individuality and achieving control.
In my experience, childcare is based on constant reciprocity. My child’s fingers meet my fingertips, and we look after each other. The futuristic optimism that holds that human vulnerability, old age, dependence, relationships and powers and empathetic powers and contexts can be institutionalized threatens the present and forces the “fantasies” of the system upon it. Childcare must be restored through the values of all humans, which cannot be replaced though proceduralized means such as institutions or technology.
Suddenly, the bedroom door opens. My child, half asleep, is crying and looking for her mum.
Monday, October 1, 2021
A notice has been put up in the elevator announcing interior work on another floor. Yet again. Constantly ripping down and rebuilding your home in order to stay there longer and in better conditions. Perhaps the biggest side-effect of the pandemic is the way it has snatched away even the chance to reflect on its causes. Unable to stand the loud noise, I end up taking my work, going to see the off-line Watch and Chill exhibition, then going to work in a café. I’ve only been away from Seoul for three years, but in that time the neighborhood and streets I knew have changed completely. Cafés have appeared throughout the alleyways in residential areas, and the number of young people doing temporary work without a steady job has risen just like the number of cafés. And of young lovers watching Netflix on shared laptops. Watching them take endless photos of each other as they watch their films, I suddenly find myself wondering how an on-line platform presented by a museum could every reach them.
The contemporary art environment, by way of new media, has brought change both to exhibitions and works and to the nature of viewers. To the new generation of “viewers,” perhaps, an off-line exhibition is merely about re-confirming things seen on-line, or re-arranging things seen at an actual museum, via the internet. Reading a review by a blogger, which describes the exhibition in more detail than the texts at the museum, I fall under the illusion that I have viewed the exhibition again. Thinking about the sense of tautology I felt when viewing Watch and Chill’s on-line platform and its corresponding off-line exhibition once again reminds me of the ambivalence faced by contemporary exhibitions.
Exhibitions today are like single organic entities, and the artworks displayed within them are their organs, interacting, assisting, competing, and sending and receiving signals. In so doing, the life-filled character and conditions of the works bring the exhibition, to some extent, “to life.” And the resulting animal is clearly one that feeds on viewers. Viewers walking into the exhibition venue and making their way around it are digested and absorbed by the works; ultimately, each changes the other. The skin of this species known as the “white cube” is, generally, white.
But at a certain moment—around the time when viewers began carrying smartphones and being constantly logged on to their accounts—the white cube began to retch. Its violent vomiting not only spewed out viewers from the exhibition venue into online space, but expelled its own organs from within its skin. Inside and outside were reversed, like something from a Junji Ito manga. The exhibition’s organs (artworks) are individually conveyed into the on-line space outside the white skin, where they truly are “exhibited,” “distributed” and “sold.” But even more creepy and disturbing is the fact that, despite all this, the beast does not die. That the empty white cube remains alive, wriggling around.
This calls to mind reversible clothing. Practical garments of this kind can be worn in at least two different ways. Clothes with the same silhouette but two different patterns. This switching of lining and outer fabric is dramatic. Because until a reversible jacket is reversed, there’s no way of knowing what its inner (or outer) surface looks like. But after a few of its “dramas” have played out, the switch tends to lose its effect. We are no longer curious about its inside (or outside). In the same way, works vomited out of the exhibition venue are judged and deconsecrated according to image-capital standards alone.
Just like, as Benjamin noted, art loses its aura in the post-ritual age, works spewed outside the skin of the white cube lose their original animate qualities. Or at least appear to. At this point, institutions and viewers sometimes try to bring works back to life by cramming them back into the mouth of the white cube. Reversible. Turning back the other way. Because they don’t want art without an aura or organic qualities, either. Artworks today thus move constantly from inside to outside and back, like ‘a rabbit’s liver’ in a folk tale, as the white skin is reversed again and again. This is reminiscent of the way on-line space opens and closes the private realms of individuals. The aesthetic animal that is the exhibition has its hidden inner side repeatedly plundered, then returned, by social media. Trade continues endlessly according to the exchange rate between aesthetic aura and capitalist secularity.
Within this cycle, the white-skinned beast, as everyone knows, is a metaphor for the situation faced by art and exhibitions today. The steady feed of feelings that reaches us via contemporary media platforms sometimes provides an experience akin to an actual exhibition, replacing or even transforming experiences of reality. In short, why has it been possible for exhibitions to continue since the beginning of the pandemic, and why have artworks returned to exhibition venues to face viewers? Ultimately, artworks return to physical space, and contemporary art/exhibitions/capital hide behind abstraction that cannot capture concepts or commercial value.
Friday, October 10, 2021
We moved into this home last summer. It’s an old apartment located next to a new apartment complex built as part of a large-scale development project. I joke that it’s convenient because we get to benefit from the facilities of the new complex, too, but in fact my child and my favorite place in the neighborhood is the streets of the “less” developed market opposite. I have to pass through the lanes of the traditional-style market each time my child and I go to the children’s library run by the district council. We pass by low-rise apartment houses surrounded overbearingly by huge apartment blocks, then thread our way through the network of alleyways. The reason I feel an unfamiliar emotion amid the familiar backstreet scenes I have known since childhood is probably the feeling of strangeness produced by their contrast with the clean, new complexes right next to them. Today, real estate capital ends up sniffing out and colonizing every last inch of surplus space in Seoul. In a situation where the cashability of apartments is bringing uniformity to the middle-class living environment, alleyways pushed aside by development represent not threadbare nostalgia but perilous desire.
When I walk through these streets with my child, we cannot simply walk. To kids, with their instinct for running at all costs, Seoul is a dangerous city. “There’s a motorbike! Stand against the wall! I check my child’s walking and she looks after herself. Which way shall we go today? Faced with the spreading, non-linear branches of the alleyways, our five senses come to life. Sounds of a radio and an old woman’s voice coming from a house somewhere; children running around. Suddenly, a shop owner cleaning up in front of her store turns her gaze to my child, and she covers her face, overcome with shyness. She watches and experiences these streets intensely; they must seem new even though she walks them every day. By contrast, the “boundaries” between each facility in the new apartment complex are clearly defined, making it a pleasant place for a walk. The landscaping in the well-ordered complex presents you with a familiar “natural landscape” every bit as familiar as a bonsai tree. But it somehow feels as if we have been exposed to more limitations in order to experience these things. We’re not allowed to touch the landscaped features, and the water in the artificial waterfall only flows at set times. In order to get home, we have to pass the barrier at the entrance to the complex, open the door to the shared lobby, get in and out of the elevator, then, finally, unlock the apartment door. The number of gates to be passed is steadily increasing. And that’s not all. I feel ashamed to see the various “Outsiders Prohibited” signs around the complex while in the company of my child. Outsiders must not be allowed to enjoy the landscaped gardens and facilities maintained using the fees paid by residents, they are saying. Boundaries exist between people, too.
The reason I have contrasted these scenes with such extreme subjectivity is that the landscape of urban life today is not that different from the way we experience art. Since the start of the pandemic, institutions in the art world have swiftly re-imagined the accessibility of art, making it more convenient and systematic than before. Meanwhile, the number of stages required to gain access is also increasing. Isn’t it actually easier to just go to a museum and view works there? To access on-line platforms, you have to enter personal information and acquire an “ID.” After that, you are made to go through several more stages before you can access the artworks. Perhaps the last of these is clicking on the triangular play button. This new and unexpected mode of operation—as if intended by the financial backers of the platform—may elaborate the consumption patterns and tastes of viewers into clearly-divided categories. But, paradoxically, such devices actually decrease our moments of “encounter” with artworks. Just as I, after passing through each prescribed gateway, am unable to meet my neighbors.
Last year, I encountered Gerard ter Borch's Mother Combing Her Child's Hair (1652-1653) at Mauritshuis Museum in The Hague. But it’s clear that few people in the museum will pay much attention to this painting and its tranquil indoor scene. That’s because it hangs immediately to the left of Johannes Vermeer’s Girl with a Pearl Earring (1655). Located just next to the famous painting and surrounded by people crowding in to get a glimpse of the latter, this work is not only hard to see properly but in a situation where it can hardly expect close attention from viewers. I stood in front of the dismissed work for some time, thinking how perverse its location was. All the while, viewers were telling me to get out of the way so that they could take photos with the girl with the pearl earring. But given that platforms like Netflix preclude even the possibility of such an encounter, the fate awaiting the mother combing her child’s hair may be even harsher.
Of course, experiencing art only within a “system” that posits the existence of viewers will markedly reduce the possibility of individual contextualization. On the institutional path that delivers us to content in accordance with guidance provided, there are no “side” streets. And this linear frustration also affects my condition when viewing works on platforms. Despite the thought that the power of “scrolling” bestowed upon me may be a discourtesy to the artworks, I kept dragging the scroll bar to jump to the points I wanted to watch. Then, at a certain moment, I got used to the sensation of scrolling, and even managed to delude myself into thinking that I was controlling time. Anywhere other than inside the black box of a cinema, where there’s no choice but to watch the screen, I end up becoming an overly distracted viewer. And, on another hand, the power of the artist to rupture defined temporality also caused me a certain feeling of discomfort. It was a sense of burden, deriving from the fact that I alone was responsible for properly appreciating the works. I wasn’t entirely glad to find this personal flow of time completely at the will of my fingertips.
But this feeling also brought new experiences: despite the ironic autonomy, I also encountered works that made me obediently follow the intentions of their creators. It was a kind of declaration of surrender. “I hereby return the power of the scroll bar.” Once was not enough, and I found myself viewing these works several times. I saw this as a new way of discovering the unique power of works—a power upon which institutions could not encroach. In this way, on-line platforms can become an option for some citizens, in conditions created by some circumstances. Yet at the same time, this also means that the on-line “migration” by art museums should not be just an easy reaction to the pandemic. Because alternative approaches are no more than attempts by the art museum system to escape the relationship of tension that exists between artists and viewers. Clearly, when art museums imagine this future, it remains a fact that their top priority is including the things they have previously omitted and excluded.
In this sense, the fact that an exhibition of works posthumously donated from the collection of a chaebol industrialist is proving an enduring hit even amid the pandemic is deeply meaningful. Reservations for viewings closed a month ago, revealing new and previously hidden Korean art lovers. But, faced with this ironic scene, I want to ask: If young children don’t go to contemporary art museum, will museums go under? Of course they won’t. Will museums go under if they show no works by foreign artists? Not completely. Will art museums go under without Lee Kun-hee? Perhaps they will. These questions and answers will have to be re-written by the art museums that we must now newly imagine. Who, here and now, are we, and what are our shared experiences? Who do we have to be, and what do they have to be?
* The incidents described in this diary may be real and may be fictional. But whichever is the case, it won’t make much difference. Because the thing I experienced most fully on this platform was a feeling of having experienced something I haven’t experien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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