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주체로서 관객: 감각적 사고를 통한 지적 해방
이여로
어느 전시1에 “관객으로 참여하면 되겠네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이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건 ‘관객’과 ‘참여’라는 말 사이에서 발생한 기분이었다. 그날은 퍼포먼스가 있었다. 전시에 ‘참여’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퍼포머’이거나 ‘작가’이거나 그것을 보고 평문을 작성하는 ‘평론가’, 못해도 참여를 신청한 '일반인 보조자’는 되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 따위를 나는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이 생각을 지금까지 갖고 있고, 지금 다시 말하는 까닭은 내가 ‘관객’이라는 말에서 벗어난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평론가’라는 이름으로 전시에 초청받았지만 내가 어떤 사물과 사건 앞에서, 즉 전시와 작업물 앞에서 기꺼이 말하고 싶은 권리와 의무를 느끼는 이유는 내가 ‘평론가’라고 불리기 때문이 아니며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관객이나 독자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 상태나 상황에 가깝다. ‘관객(보는 사람)이나 독자(읽는 사람)가 된다’함은 전시나 책에 관여하는 경험의 순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말은 동시에 강하게 대상화되어있다. 보편의 순간을 절단해 결론의 자리로 만듦으로써, 관객이나 독자는 ‘보기만 하는 사람’, ‘읽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린다.
‘관객(성)’에 관한 연구는 주로 영화나 연극 분야에서 이어져 왔다. 이러한 연구는 대체로 보는 경험의 기저에 깔린 복잡한 구조나 영향 관계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연출가나 작가에 의해, 혹은 어두운 영화관에 들어서거나 간식을 챙겨서 노트북 앞에 앉는 물리적 환경과 장치에 의해, 그리고 ‘어떻게 봐야 한다’는 담론적 배경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경험을 결정 짓는 ‘무엇’이 있다는 전제를 공유한 채, 이 ‘무엇’의 자리를 정신분석, 문화연구, 젠더이론, 매체이론 등 여러 관점들이 대체한다.
이러한 요약은 조금 부당하다. 이 연구들도 ‘관객’과 ‘보는 사람’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타율화된 이때의 ‘관객’은 사실 실존하는 주체가 아니라 ‘위치’나 ‘모형’에 가깝다. ‘관객’ 뒤에 ‘성(性, ship)’이라는 접미사가 붙는 것도 이러한 비인격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관객성’의 수행자로 가정된 ‘관객’이 실존하는 관객은 아니다.2 하지만 앞선 요약이 ‘조금’만 부당한 까닭은 이러한 구분이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상황을 자기에게로 통일하고 종합하는 근대적 자아의식이 당대 독일어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기도 했다.3 즉 문장의 주어로 등장하는 ‘나’는 심리학적이고 인격적인 현실의 내가 아니라 문장을 완성시키기 위한 형식적 장치일 뿐인데, 이것이 현실의 나와 혼동되고 겹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관객’이라는 말도 비슷한 처지에 있다. 아무리 이론적 연구에서 ‘관객’을 ‘관객성’을 수행하는 가상의 주체라고 상정해도, 우리가 이 말을 현실의 방문객, 보는 사람 등에도 그대로 사용하기에 개념의 대상화 및 실체화를 의식적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문화행정, 컨텐츠 산업의 맥락에서 이 말이 사용되는 용례를 살펴보자. SNS 상에서 발화되는 독자나 관객에 대한 선입견들, 혹은 이 글을 시작하며 떠올렸던 나 자신의 경험은 어떠한가. ‘관객성’이라는 말은 대학 내 전문연구에서 빠져나오는 즉시 실체화된다.
그렇다면 ‘보는 사람’은 어떨까?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맥락으로부터 이곳에 도달한 이 사람은 해석적으로 사건에 참여하며 개개인의 규칙을 갖고서 의미 혹은 무의미를 결정짓는 ‘자율적 주체’로 간주된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주체’는 자율성과 타율성 사이를 오가는 존재기에 반대로 ‘자율성’의 상태에만 머무는 주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관객의 수동성에 능동성을, 조작에 저항을, 거리두기에 영향받기를 맞세우고 이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기분좋게 끝마친다면, 이것은 실상 관객성과 타율성의 여집합을 지시할 뿐이다. 타율성의 조건을 밝히는 것 이상으로 ‘자율성’의 조건을 탐구하지 않으면, ‘자율적 주체’ 역시 그저 이상화된 모형에 불과해진다.
‘관객(성)’을 조작의 대상, 일방적 관찰의 대상으로 두지 않고 어떻게 사고할 수 있을까. 중국의 영화 감독 왕빙(王兵)은 “이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한 명이고 관중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4 하지만 나는 이러한 소극적 긍정에서 더 나아가고 싶다. 어떻게 고유한 의미화 가능성과 힘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또한 왜 그래야 하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관객’이라는 (이미 대상화된) 말을 나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밝혔다. 우리는 다양한 입장에서 각자가 보는 것을 의미화한다. ‘작가’로서 전시에 왔을 때, 다른 작가의 창작 방법론을 중점에 두고 관찰할 수도 있다. ‘한국미술사 연구자’라면 역사의 맥락에서 이 전시와 작품의 위치를 가늠할 것이다. 기획자라면, 설치 전문가라면, 혹은 이 전시장 맞은 편에 있는 ‘실버영화관’의 방문객이라면, 등등. 우리는 이 ‘등등’에 담긴 관점을 예상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5 그렇지만 이 모든 사람은 우선 ‘관객(보는 사람)’이다. 따라서 ‘관객(보는 사람)’의 능력을 규명한다는 것은 각자의 관심으로 특정되기 이전의 보편성을 탐구하는 것이며, 이 보편성이야말로 각자의 특수성으로 나아갈 기초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주체성을 위한 연구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관객(성)’이라는 영역이 우리에게 관찰자 자신이 포함되는 관찰 시스템을 고안하라고 강제한다면, 이는 우리 다양한 관객이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관심과 입장에 있다는 현실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실체적 차이가 “능력을 소유한 자들과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6이라는 구분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능력의 서로 다른 발현을 위한 이론적 기초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
‘미적 주체’라는 말은 즉시 ‘모호하고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미적’이라는 말도 그렇고, ‘주체’라는 말도 그렇다. 심지어 두 말을 붙여놓았으니 더더욱 그렇다. 이 말이 ‘무엇’인지, 이 말에 ‘맞는’ 현실의 사물이나 사건을 떠올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지금 ‘특별한 취향을 가진 개인’을 떠올려 본다. 혹은 그 ‘취향’에 따라 자신의 행동과 판단을 조직하는 사람을 떠올려 본다. 이것이 ‘미적 주체’가 맞을까? 아무리 예시를 떠올려보아도, 그것이 ‘맞는지’ 판단할 공적인 기준이 우리에게 없다. 이것은 일상언어의 문제만이 아니다. 전문연구의 영역에서도, 이 두 단어에 대한 ‘광범위하게 합의된 정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그 정의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알려줄만큼 구체적이지 않다.
현대 한국어는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말을 제공함에도 우리는 굳이 ‘미(학)’이라는 말을 쓴다. 또 ‘나’라거나 ‘누군가’라는 여러가지 인칭대명사들이 있음에도 우리는 ‘주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러한 사용으로부터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다른 어떤 의미를 구별하고 이 단어(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지를 우리는 표명한다. 단어(사물)의 의미가 공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확정될 수 없는 상태는 예술작품의 존재론과도 유사한 조건이다. 이로써 ‘단어(사물)’은 각자의 관점이 투사되고 발전되며 서로의 관점들이 경쟁하는 ‘장소’가 된다. 그 자체로 이견과 사고를 발생시키는 조건에 처해 있는 단어를 이제부터 ‘개념’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그리고 ‘개념적 사고’의 힘은 ‘사고하는 자가 그 정의와 대상을 자율적으로 정의하고 연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고 간주할 것이다.
즉 ‘미’와 ‘주체’는 분명한 개념적 역사를 갖지만 이 글은 그것을 참조하지 따르지 않는다. 그것을 성실하게 소개하며 당연한 전제로 삼는 것이야말로 조은비 기획자가 우려했듯이 ‘엘리티시즘적’이고 ‘회귀적’인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일상언어에 도입된 이 말들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중에는 이미 ‘미학’이라는 이름이 포함된 수많은 대중서가 있고, 수많은 ‘미학 강의’가 있으며, 몇몇 대학교에는 ‘미학과’가 독자적인 전공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이 학문이 제시되자마자 버려졌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 버려진 것으로부터 이 글이 필요로하는 ‘미적 주체로서 관객’이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볼 참이다.
‘미학’을 ‘잃어버린 단절’이라고 말하면 의아하게 들린다. 누군가는 ‘미학’이 인류와 문명의 시작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약간의 공통점에 기반해서 현재의 관점을 과거에 투사하는 이러한 역사 해석은 유의미한 혼동이 될 때도 있지만 지금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주로 오늘날의 시각에서 합리적으로 보이는 방식으로 과거를 이해하는 것이며, 현재의 관점을 과거로 보충하고 동일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현재의 ‘미학’에는 내가 궁금한 것이 없고, 그것은 나의 고민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일은, 내 관심을 따라가며 작지만 결정적인 차이와 틈을 발견해 키워 나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작은 차이라도 그것을 ‘결정적’으로 간주하는 일, 그것을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차이로 여기는 것이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
현대적 의미에서 미학(Aesthetica)은 독일의 철학자 알렉산더 고틀리프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새로운 학문은 그 이름만 남기고 곧장 폐기된다. 즉 우리가 지금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루는 대상과 관심은 최초의 ‘미학’이 가졌던 관심과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느끼는 특정한 감정이나 경험을 유발하는 주관적 조건을 다루는 것(취미비판)이 아니었다. 또 예술작품과 같은 특별한 종류의 사물과 사건의 본질이나 특징, 기능이 무엇인지 따져 묻는 것(예술철학)도 아니었다. 취미비판과 예술철학은 그 이후 미학의 주된 주제로 자리 잡는데, 이제부터 이것을 ‘바움가르텐 이후 미학’으로 구분 짓는다.
그리고 ‘바움가르텐 미학’을 기성 사유의 대안으로 소개하고 계승하려는 것도 아니다. 문헌학적 비평과 분석을 통해 ‘바로 그 텍스트’를 다루기보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의 지표와 발판으로 삼을 뿐이다. 바움가르텐의 『미학』은 “1742년 나는 낮은 단계의 인식 능력이 진리를 인식하게끔 하는데 도움이 될 새로운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라고 시작한다. 여기서도 ‘감각’은 ‘낮은 단계의 인식 능력’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인식 체계 내부에서 위계의 자리를 할당 받는 것과, 그것을 독립된 인식 시스템으로 간주한 뒤 그것들 ‘사이의’ 위계를 다루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7 가령 ‘바움가르텐 이후 미학’은 ‘감각’에 새로운 중요성과 의미를 부과하며 그것을 상찬하지만, 결국 ‘이성’의 수단이나 재료, 매개로 간주되며 기존의 인식 체계로 환원된다. 바움가르텐의 ‘미학’은 감각을 그 자체로 인식의 능력이라고 간주한다. 이것은 문자와 명제를 이용한 기존의 인식 체계를 곧장 상대화한다. 인식의 존재와 방법이 복수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한 마디의 말이 열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관객은 ‘봄’으로써 무엇을 인식하고 어떻게 의미를 구성해나갈 것인가?
*
시각 언어에 숙달된 자가 겹겹이 쌓여 올라간 붓질의 축적물로부터 다시 하나의 붓질까지 거슬러 내려가며 한 폭의 회화가 갖는 구조적 특징, 왜 여기가 이렇게 이런 색으로 그려 혹은 왜 그려지지 않았는지, 예술의 지나간 역사와 동시대의 흐름까지 상기하며 그것이 하나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정보와 기능을 갖고 있는 반면, 나는 거기에서 재현된 사물을 찾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시 오프닝에 찾아온 여러 관계자들, 그들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고 그것들을 잘 취합만해도 훌륭한 해설이 될 것이다. 전시장을 나와 기획자나 작가에게 직접 그들이 품었던 가치나 의도까지 들어 알게 된다면, 그것을 내가 보는 것과 적당히 병렬하는 일은 무척이나 손쉬운 일이다. 그러한 글은 무언가 전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재현된 사물을 보는 것’의 또다른 버전인 ‘정해진 의미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정보’의 차원에 머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니까, 누구도 결론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모두 ‘사고해야 하는’ 시작의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자리에서 쓸 것이다. 나는 내가 본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즉 나는 자신의 권한을 제약없이 누릴 수 있는 이념으로서의 관객도 아니며, 특별한 정보를 더 접하고 있는 관객도 아니다. 무수한 현실적 제약 속에서 이 권한을 살펴야 하는 관객, 자신의 감각이 ‘맞는지’ 끊임없이 눈치를 보아야 하는 관객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모름’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삼아보겠다. 나는 모르지만,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안다. 또 나는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모르는 것과 아는 것 사이를 오가는 여러 형태의 관계맺기가 나에게 주는 것, 그것을 나는 지식이라고 부르며 이해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이것이 ‘곰’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이것이 ‘나무’라는 것을 안다. 나의 ‘봄’은 (흔히 부정적인 것으로 대상화된) ‘사실적 재현’의 논리를 따른다. 이것은 예술에서 지향하는 시각적 논리와는 다른, 일상의 시각적 논리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것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하는가? 혹은 내가 본 것을 설명해줄 외부적 지식이 필요한가? 다만 나는 ‘봄’의 과정을 따라갈 것이다.
즉 지금 나는 ‘계속 따라간다’는 단순하고 유일한 의지만을 따르고 있다. 노예주의 〈몸은 결코 단일한 적이 없었다〉에서 내가 이어서 보는 것은 색이다. 곰이 놓여 있는 색. 곰은 옅은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양분된 색으로 된 환경에 놓여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곰이 숲이나 동물원에 있지 않고, 이 색들 속에 사는가? 내가 가진 재현적, 사실적 선입견이 강하면 강할수록, 내가 가진 문화적 학습이 전무할수록,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의식 또한 강해진다. ‘봄’은 어떤 사물이 현재 이러이러한 상태라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수동적인 주어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 자연스럽지 않다. 곧이어 나는 ‘왜?’라거나 ‘그래서?’라고 묻게 된다. 이러한 물음들은 ‘차이’를 처리하는 지적 조작의 물음이다. 나는 '이 차이'를 이해시켜줄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만족스럽게 들을 때, 차이는 정보의 차원으로 전락한다. 또한 이 물음을 이어가지 못 할 때에도, 이 차이는 대상화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는 앞서 말했다. 나는 다만 ‘계속 따라가야’ 한다.
무엇을 더 볼 수 있을까? 나는 이 곰의 시선을 본다. 이 곰의 목이 꺾인 방향과 눈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본다. 여기8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이 있다. 나의 ‘봄’은 두 번째 ‘차이’를 마주한다. 이 사람과 같은 것들에게 표정은 없고 색깔만이 있다. 노예주가 그린 이 인간(같은 것들)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이상한 인간으로 볼 수도 있고, 새로운 인간이나 인간 아닌 존재로 볼 수도 있다. 왜곡된 형상은 그 자체로 우리의 경험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이형(形異)의 앞에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나는 이것이 사람인지 아닌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기준의 이탈로 볼 것인지, 새로운 기준으로 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동시에 첫 번째 ‘유사성’을 발견한다. 쪼그려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앞서 곰이 살고 있던 색과 동일한 색을 갖고 있다. 그것의 배경으로 존재했던 색이 이번에는 형상으로 존재한다. 나는 아직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 존재들을 연결해서 떠올리게 된다.
몽상에 빠지기 전에 ‘봄’을 이어가자. 색-없음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색, 더 왜곡된 형태, 떨어진 머리… 신민의 〈가자〉는 '알고 있는 것'과의 확인으로부터 나를 소극적으로 이탈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나의 ‘봄’은 불안에 놓인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다. 나는 넘어설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하지만 예술은 이러한 넘어섬을 관찰자에게 긍정적으로 동기화시키는 여러 장치를 갖는다. 힘과 불안함이 동시에 진동하는 큰 것의 형상들, 고개 숙인 채 떼지어 이동하는 작은 것들, 색의 동일성, 형태의 유사성, 규모의 신화적 대비가 이어지면서 나는 ‘이것’에 일방적인 경외감도 연민도 투사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사실판단, 이것이 좋으냐는 가치판단의 외적 기준을 튕겨내는 이 복합적 존재 앞에서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다만 ‘기억’을 하게 된다. 실체화를 거부하는 추상의 존재는 나를 넘어섬의 상태 그 자체에 머물도록 만든다. 그리고 나에게 기억된 추상적 형상은 앞으로 내가 겪을 구체적 사건과 사물들 앞에 나타나 그것을 또다른 방식으로 연결지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물리적 형상은 그 자체로 개념이다. 우리는 분명 이러한 사고에 익숙하지 않다. 개념은 문자로 적힌, 학술적 사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앞서 정의한 기능에 따른다면, 이것은 분명 개념이다. 나는 이 경험을 하기 위해, 혹은 이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미술 지식과 조각 개념을 학습한 것이 아니었다. ‘보는 행위’야말로 하나의 개념화 작용이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내가 ‘계속 보기’의 의지를 거두는 순간 이것은 다시 주어진 사물, 판단의 일방적 대상으로 되돌아간다. 이민지의 〈그라운딩〉 연작 사진을 보는 경험은 이상의 시각적 개념화를 ‘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확신시킨다. 여기에서 나는 그토록 익숙하게 찾던 현실의 몸을 본다. 하지만 이 몸은 ‘이것’의 예시나 실체로 나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는 땅에 박혀 꺾인 채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지각은 보이지 않는 일부를 이미 보았던 전체로 통합해서 상상한다. 고개를 들어 턱과 얼굴의 돌출부 일부만이 보일 때, 그것의 윗편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원형의 머리통이 있다고 우리는 상상하여 인지한다. 즉 보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 인지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음을 넘어 그 형체가 계속된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평소라면 인체라는 사물로 상상되었을 그 형체가 여기서는 새로운 상상의 도전을 받는다. 그리고 이때의 상상은 앞선 ‘봄’들과의 연결로 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던’ 조각의 머리통, 회화의 얼굴들은 내가 보는 것과 겹쳐지기 시작한다. 이 사진 앞을 굴러다니는 검은 구체는 내 발치를 건드린다. 이 감각의 연결이 봄으로써 상상하게 되는 전체를 기존의 것으로 향하지 않도록 막는다. 그러나 이것이 ‘새로운 전체’를 특정하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빛’을, 말 그대로 비춰지는 것들로 그 힘을 인식하게 되는 추상적 사태를 암시한다. 구체적 형태로 소급되는 이 형상(form)은 다만 각자의 연결을 지지하는(forming) 방식으로 점차 구체화되고 있을 따름이다. 형태적으로 지극히 어지러운 식물들의 진창, “서로 지탱하는 잔해들”이 형상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숲이다’라는 주어진 사실과 정보가 다시금 기호와 개념으로 전환하는 순간은 이러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가자〉의 전면적인 색-없음에 대비되는 거의 추상적인 밝음, 왜 ‘이것’은 여기에서 밝은가? 이것은 밝지 않을 수도 있었다. 왜 ‘이것’은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전체를 찍었는가, 이것이 바로 ‘이것’으로 존재한다는 ‘필연성’을 가르쳐 주는 것, “서로의 존재의 상실을 막는”9 것은 다름아닌 다른 존재와의 연결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된다는 것은 따라서 도덕적 주장이나 당위가 아니다. ‘우연성’이나 ‘연대’와 같은 어떤 개념, 연구, 인식이 먼저 있고, (바움가르텐 이후 미학의 입장처럼) 예술이 이것을 표현하거나 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 수준에서 발생하는 인식 작용이며, 바로 이 감각의 장 속에서 내가 본 것들이다. 우리는 그저 ‘봄’과 ‘계속 봄’에 의해서 흔히 ‘사고한다’는 말로 일컫는 행위를 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본 것과 아는 것, 모르는 것을 비교도 하고 결합도 하며 분리시킴으로써10 새로운 인식을 마중나가고 생성해내는 이 과정이 ‘지적 과정’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11
*
미술교육학자 최성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작품, 전시, 사람, 공간 사이에 다양한 관계의 결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12 이 관계의 결은 셈하기 어렵다. "작품과 전시, 작품과 사람, 사람과 전시, 사람과 공간 등", 여기서 ‘등’으로 열어 놓은 관계의 복잡성은 단순히 항들의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하는 시점이 권리상 무한정하다는 점에서 축소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관계는 기획자가, 작가가, 행정직 공무원이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 아니다. 또 공부를 많이 한 특별한 관계자만이 이러한 관계맺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기초적이고 보편적 능력임을 입증하고 실증하는 작업이 나에게는 필요했다.
시각예술전시에 관한 평론인 이 글에서13 나는 관객으로 본다는 경험으로 관계성의 기반을 마련하고, 반대로 관계로서 본다는 경험을 설명했다. ‘관계맺기’라는 동사로서, 또 이렇게 만들어진 ‘관계’라는 구조체로서, 이 말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처리하는 방법이 되며, 또 이러한 결과를 다시 자신에게로 되먹일 수 있는 근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내가 ‘(계속) 봄’의 과정을 따라가며 직접 맺었던 이 관계들은 그 자체가 감각을 통한 사고의 과정이었고, 지식이나 개념이라는 문자 편향적인 말들 또한 이러한 기능과 관계로 다시 정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고의 축적을 통해 나는 가능과 불가능을 가르고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인식의 체계에 이른다.
지금 인류 사회에서 지식이나 인식이라고 불리는 체계는 문자 기호에 과잉의탁하고 있다. 지식과 지혜를 구분 짓고, 뜨거운 감성과 차가운 이성 따위를 구분 짓는 전제들은 어디에나 만연하다. 그러나 문자라는 기호도, 참과 거짓을 구분 짓는 명제라는 형식도, 모두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학습하고 유통하는 제도로의 접근성 또한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기성의 언어, 체계, 제도로의 접근성을 지원한다는 것은 온건한 배타성일 뿐이다. 지적 해방은 우리 각자가 각자에게 맞는 기호와 형태로 관계 맺으며 이것이 곧 지식의 자기 생산임을 상기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이를 지지할 이론적, 행정적, 정동적 환경 속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이 글은 그러기 위한 작업 중 하나이다.
이여로 / 지원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예술사업과 웹진, 1인출판 등을 통해 2019년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지식생산의 보편화, 개개인의 언어화를 인문예술 분야에서 탐구하며 비평, 출판, 기획을 이어가고 있다. 만든 책으로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 (이동휘와 이여로 공저, 인현진 디자인, 미디어버스, 2022) 등이 있다.
각주
1. 《On going Project 역촌 40: 백오십점일평방미터》, 연기백·노준태·김태용·김환고·라삐율· ·일시적 식탁·김동수·Boris Stout·묘향·김지환, 서울 은평구 역촌동 40-13, 2021.2.23-3.24. 이 말은 해당 전시에 참여한 시각예술가이자 공연연출가 라삐율에게 들었다.
2. 이상의 두 문단은 다음의 논의를 참조했다.
Caetlin Benson-Allott, 『The Stuff of Spectatorship: Material Cultures of Film and Television』, California Press, 2021.
Michele Aaron, 『Spectatorship: The power of Looking on』, Wallflower Press, 2007.
E. Deidre Pribram, 「Spectatorship and Subjectivity」, Molloy University, 1999.
Carlo Comanducci, 『Spectatorship and Film Theory: The Wayward Spectator』, Palgrave Macmillan, 2018.
3. 임마누엘 칸트, 최재희 옮김, 『순수이성비판』, 박영사, 1983.
4. 「왕빙, 그리고 〈사령혼: 죽은 넋〉」, 웹진 DOCKING, dockingmagazine.com/contents/13/90/?bk=menu&cc=&ci=&stype=&stext=&npg=1
5. 미술 전시장을 찾는 관객층의 실질적 한계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제한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 글의 이념이다.
6.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해방된 관객』, 현실문화연구, 2016.
7. 따라서 미학을 ‘낮은 단계’라고 간주하는 것은 바움가르텐 시대 독일의 사회문화적 조건의 문제이며, 그것은 여기서 다룰 주제는 아니다.
8. 노예주, 〈하루를 늦추는 것; 부러지고도 온전한 채로, 비통해 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 단일하지 않게 존재하기〉, 97 × 130.3cm, 캔버스에 유화, 2022.
9. 노예주 작가가 인스타그램 계정에 공개한 작가노트.
10. 이 세 가지 행위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재판 서문을 시작하며 제시한 것이다. 이 행위들이 정확히 인지의 필요충분조건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지적으로 사고하고 행위한다는 것은 이처럼 이와 같은 기초적 조작이 아닌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 이상의 논의에서 나는 시린 세노(Shireen Seno)와 장서영의 영상 작품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작업들이 상대적으로 나에게 익숙한 문자와 영상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나는 그것들을 곧장 하나의 체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반대로 내게 익숙하지 않은 매체들, 그것들의 당황스러움에서 나의 감각과 사고를 이어가고자 시도했다. 이때 우연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앞서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감각적 인식의 구성적 일부였다. 내가 앞서 알고 있는 어떤 기준도, 나의 눈이 나에게 보여주는 것에 의하여 완벽하게 지지받지 못 한다. 또 다른 보기와 연결되며 시시각각 변하는 이 흐름을 정박하는 것은 오히려 ‘아는 것’의 부당한 월권이다. 이제 나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 또한 이어서 읽기를 기대한다.
12. 윤주희·이슬비·조은비 모음, 『돌보는 시간: 미술관과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관계 맺기 연구』, 202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예술사업 연구지원 결과보고, 2022, 12쪽.
13. 회화, 조각, 사진, 영상이라는 장르화된 예술 역시 어떠한 감각 언어를 대표할 권한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축적된 집단적 실천은 관찰의 용이한 배경이 되어준다. 이 글은 따라서 예술사의 맥락에 있지 않다.
*이 글은 《우연을 기대》 전시의 전시 연계 프로그램 “비평 라운드 업”를 위해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