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문장들

윤원화

나무들은 스스로 살아가기에 적합한 미기후를 형성한다. 이 문장이 언제 어디서 머릿속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날 다섯 개의 전시를 이어 보았다. 대부분 영상 작업이 포함되었고, 내레이터가 원고를 낭송하지 않으면 관람자를 위한 안내문이 별도로 제공되었다. 전시들은 때로 펼쳐진 책처럼 보였다. 거기 어딘가에 저 문장이 있었거나, 또는 그저 눈앞을 스쳐가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떠올랐을 수도 있다. "문장은 두 가지 힘이 있다. 그것은 영원하고, 한순간에 말해진다. 그것은 익명적이지만, 살과 피를 가진 자에 의해 말해진다. 나는 이 두 가지 사실에 부응하려고 애썼다." 며칠 전부터 읽고 있는 조금 오래된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쓴다. 그러나 나무들의 생활에 관한 증언은 좀 더 점진적이고 집단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나무들에 의해 발산되어 적절한 센서를 통해 데이터로 변환되고 숙련된 연구자에 의해 다시 인간의 말로 번역될 것이다. 관람자는 숲길을 걷는 것처럼 전시장들을 떠돈다. 우리는 나무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떠올린 것은 마지막에 도착한 《우연을 기대》의 전시장에서 나무의 이미지와 인간의 이미지가 퍼즐 조각처럼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있었고 나와 내 휴대전화는 거의 방전된 상태였다.

또는 이미 너무 많은 말과 이미지들을 흡수해서 거의 포화 상태였다고 하자. 우리가 나무와 같다면 몸의 절반이 흙에 파묻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토양은 사물이자 공간이며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누적되어 천천히 분해되는 기억의 정화조다. 다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은 좀 더 늪지대에 가깝다. 발이 바닥에 닿았다는 감각은 종종 착각으로 밝혀지고, 뿌리를 내리려는 시도는 또 하나의 부유물을 생성하는 데 그친다. 고대 신화에서 새가 물고 온 나뭇가지는 대홍수가 끝나고 육지가 다시 나타났다는 희망의 신호로 여겨졌다. 불규칙한 조수의 리듬 속에서 불어나는 나무들의 이미지에는 분명 어떤 소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 나무들은 화면 속에서 우뚝 솟은 만큼이나 베이고 쓰러지고 쪼개지고 변성되고 다시 태어난다. 나무들에 뒤따르는 무수한 타동사와 자동사가 있다. 그 말없는 문장들을 수수께끼의 지시문 또는 서로 다른 시간의 단편들로 본다면, 관람자는 이를 재편집해서 각자의 스토리보드를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들이 하는 일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간혹 이미지에서 예기치 못한 질문, 계시, 약속, 또는 적어도 어떤 문 손잡이 같은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돌려 본다.

시린 세노는 식민 시대 필리핀의 목재산업을 추적하면서 드물게 남은 옛날 사진들을 읽어 내려고 애쓴다. 전시장 입구에서 방문자들을 맞이하는 세노의 비디오 작업 〈꽃을 따는 것〉에서, 화면 속 나무들은 유용하지만 딱히 귀중할 것 없는 흔한 자원으로서 체계적으로 수확되어 가구와 집으로 변신하고 돈과 식량으로 교환되었다고 말해진다. 그 나무들은 이제 없다. 그것들을 숲 바깥을 실어나른 마법의 컨베이어 벨트 같은 것도 없다. 매 단계마다 나무를 밟고 서거나 그 무게에 짓눌리거나 또는 그저 곁에 머물면서 관계의 연쇄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사라진 숲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은 대단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둘 사이의 시간은 숲이 고갈되면 조용히 멈추고 또 다른 곳에서 재개된다. 작가는 흐릿한 사진들을 더듬으면서 비록 그것들이 낡아 보이지만 그에 각인된 관계의 형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나무를 벤다, 꽃을 꺾는다, 사라지는 것들을 사진으로 남긴다. 이런 일들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느껴진다는 의미에서 신화적 현재에 속한다. 우리가 그런 현재에 안온하게 머물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나무들의 이미지에 둘러싸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과거를 반복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우리는 비로소 뒤를 돌아본다. 그렇지만.

반대편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장서영의 〈오르페우스 후굴 시퀀스〉에서 뒤돌아보는 시선은 두 눈이 정면을 향하는 인간의 신체 구조에 어긋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결연히 앞을 향해 나아가며 생존하고 번성했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뒤를 돌아보면 ‘돌이 된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전승해 왔다. 작가는 전후사방을 볼 수 있는 360도 카메라를 달고 요가 후굴 자세를 취하는 퍼포머 겸 촬영기사의 몸을 빌려 오래된 금기를 넘어서는 전능한 시야를 실험한다. 애초에 뒤를 볼 수 있는 눈이 집요하게 몸을 휘어서 뒤를 보려는 과도한 노력은 기이한 공회전으로 귀결된다. 시간의 화살은 머리와 꼬리가 붙은 채 빙글빙글 돌면서 닫힌 공간을 이룬다. 여기는 아무것도 더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이다. 다른 시간의 가지를 찾아보자. 장서영의 스크린을 지탱하는 가벽 뒤에서, 노예주의 회화들은 매번 더 나쁘게 반복되는 시간을 막아서는 곳에 머문다. 〈하루를 늦추는 것; 부러지고도 온전한 채로, 비통해 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 단일하지 않게 존재하기〉에서 집회 현장에 모인 이들은 밝은 미래를 향하기 전에 일단 현재의 움직임을 가로막는다. 비닐 우비를 입은 사람들은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땅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등 뒤에 늘어뜨려진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은 건너편 벽에 걸린 우람한 나무의 그림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쓰러진 나무들, 살았거나 죽은 동물들의 이미지와 이웃하며 사방으로 가지를 뻗는다.

노예주는 맹목적인 전진을 중단해야만 보이는 것들을 화면으로 불러오면서 전시장을 은밀한 집회의 장소 또는 그저 이웃하는 몸들의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드문드문 늘어선 회화들은 관람자가 끼어들 수 있는 파편적 파노라마를 이루는데, 이 모임은 같은 벽면을 공유하는 이민지의 사진들과 무리 지어 바닥을 점거하는 신민의 조각들을 통해 좀 더 운동회에 가깝게 되풀이된다. 누런 흙빛의 범람지에서 녹색의 나무들은 다소 동물적인 생기를 띄고, 그들에게 잠재된 동사를 발굴하려는 듯이 추상적인 자세를 취하는 흑백의 퍼포머들은 사진가의 시선 속에서 살아 있는 그림 문장을 이룬다. 구부린다, 서로 기댄다, 땅에 박힌다, 먼 곳을 본다. 이민지의 〈그라운딩〉 연작은 나무와 인간의 몸을 등치하면서 우리가 맺을 수 있는 다른 관계의 형태들과 그로부터 전개될 수 있는 미지의 시간을 소망한다. 그러나 시간 속에 뛰어드는 자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다. 〈가자〉라는 외마디 말로 묶인 신민의 조각들은 말 그대로 부러지고 온전하고 단일하지 않은 몸들을 형상화한다. 바닥과 비슷한 색감의 광택 없는 검정색 덩어리들은 초현실적인 역사화처럼 쉽게 해독되지 않는 어떤 드라마를 함축한다. 일어선 몸과 누운 몸, 두 동강난 몸, 크고 넙적한 몸과 그것을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작은 몸들을 하나의 시퀀스를 이루는 서로 다른 국면으로 보든, 아니면 동일한 시공간에서 상호작용하는 여러 인물들로 간주하든 간에, 이들은 범람지의 나무처럼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힘의 흐름에 휩쓸려 있다. 몸들은 훼손되고 나뒹굴고 사라지지 않는다.

신민의 군상은 그들을 향해 던져진 공인지 그것을 맞고 떨어져 나간 머리인지 분명치 않은 둥근 것들을 포함한다. 이들은 조금 울퉁불퉁 하지만 구를 수 있을 것 같이 생겼고 실제로 그중 하나는 내가 전시장에 갔을 때 본체에서 꽤 멀리 떨어져서 이민지의 사진 앞에 작은 관객처럼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훨씬 더 멀리 굴러가는 것을 상상한다. 로마의 시인이었던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만물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원자들로 이루어졌고 이들이 자체의 무게로 인해 비처럼 쏟아지다가 어떤 내적인 원인에 의해 선로를 약간 이탈함으로써 우발적인 충돌을 일으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조성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유한 귀족이었다고도 하고 약에 취한 광인이었다고도 하나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그의 저작은 결정론적 인과율에 우연을 도입했다고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헌 중 하나다. 고대 원자론자들의 책은 신의 섭리와 기성 질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불온서적으로 간주되어 대부분 온전히 전승되지 못했다. 루크레티우스의 책이 후대에 빛을 보게 된 것은 그것을 보존하고 발굴하려고 노력한 사람들 덕분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그저 우연이기도 했다. 약간의 어긋남으로 2000년 전의 문장이 새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쓴다. “그러므로 파괴적인 운동은 영원히 우세할 수 없고, 생명을 영원 속으로 매장할 수 없으며, 또 사물들을 생산하고 성장시키는 운동도 만들어진 것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다. 그렇게 시초들의 대등한 싸움으로써 무한한 시간부터 끝나지 않는 전쟁이 수행된다. 이번엔 이쪽에서, 이번엔 저쪽에서 사물들의 생명력이 이기고 또 마찬가지로 패배한다. 빛의 해안을 보게 된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장례식에 섞인다. 어떤 밤도 낮을, 어떤 새벽도 밤을 좇지 않았다. 연약한 어린아이 울음소리에 죽음과 검은 장례를 수반하는 애곡이 섞인 것을 듣지 않고는.”

윤원화 / 시각문화 연구자, 비평가, 번역자. 저서로 『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의 불완전함에 관하여』(출간 예정),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등이 있으며, 역서로 『사이클로노피디아』, 『포기한 작업으로부터』, 『기록시스템 1800/1900』 등이 있다. 아카이브 전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  

*참고문헌 : 이언 해킹, 『우연을 길들이다: 통계는 어떻게 우연을 과학으로 만들었는가?』(정혜경 옮김, 바다출판사, 2012);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강대진 옮김, 아카넷, 2012);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이혜원 옮김, 까치, 2013).

*이 글은 《우연을 기대》 전시의 전시 연계 프로그램 “비평 라운드 업”를 위해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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