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성, 결단, 후기
전시 <우연을 기대>는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개념을 전시의 주제이자 일종의 태도로 차용하고 있다. 오늘날 로티 뿐만 아니라 다수의 좌파 이론가와 비평가들에게 대전제가 된 이 ‘우연성’ 개념은 거칠게 말해 완결된 하나의 세계의 (불)가능성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의 완결된 세계는 ‘완결’이라는 절대적인 목표 아래 모든 차이(들)을 봉쇄하고 봉합한다. ‘우연성’은 바로 그러한 총체성의 폭력으로부터 차이(들)을, ‘틈’을, ‘모순’을 포착하려는 시도로서 고안된 개념이다. ‘우연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발전해야 할 세계의 필연적인 보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당초 보편성이라는 관념 자체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우연한’ 구성물로서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정불변한 것으로 여겨져 온 각 개인의 자아와 정체성 역시도 ‘우연한’ 구성물임이 드러난다. 젠더/계급/인종/국가과 같은 정체성의 상수들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단지 우연적인 맥락 속에서 한 개인을 틀 지우는 가변적인 조건들에 불과하다. 세상은, 개인은, 정체성은 분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의미들의 총합이 아니다. 결코 의미화될 수 없는 우연들이 바로 이들을 이루는 구성 원리이자 토대다.
그렇다면 곧장 다음의 질문이 제기된다: 이처럼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구성된 모순과 억압의 ‘우연적인’ 결절점에 불과한 한 개인에게는 어떠한 ‘역사적인’ 방향성도 존재할 수 없는가? 다시 말해 ‘우연성’은 단지 세상이 우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할 수 있을 뿐, 어떠한 ‘현실적인’ 변화의 가능성과도 무관한 개념에 불과한가? 이러한 질문은 오늘날 ‘우연성’과 같은 개념이 ‘강단 철학자’들의 가느다란 생명 줄을 연장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라고 반박하는 또 다른 좌파들로부터 터져 나오는 불만의 큰 지분을 차지한다. 기실 이러한 불만은 ‘현실’을 이해하는 좌파 내의 관점 차이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특히 ‘우연성’ 개념이 단지 전제를 의심하기를 좋아하는 몇몇 이들의 도착적인 취향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필수 불가결한 허구이자 모순 내부로부터 급진적인 변화를 (재)발견하기위해 도입된 것임을 이해하자면 더욱 그렇다. 후자의 관점에서 ‘우연성’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우연성’은, 보편성의 이름 아래 배제될 뿐만 아니라 배제될 가능성조차 폐제된 차이(들)이 ‘필연적’으로 그러한 운명에 처할 수 밖에 없다는 ‘닫힌’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나도 우연한 존재이고 너도 우연한 존재라면, 그래서 딱 한번만 이 세계에 이런 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최소한의 가능성이 잠재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미 서로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이러한 가정은 ‘우연성과 더불어 사유하기/살아가기’라는 또 다른 보편성으로 환원될 여지가 있다. 이는 소위 ‘강박적 PC주의’라는 동시대의 문제적인 태도를 상기시킨다. 무엇보다, ‘우연성’을 가장 소박한 형태의 도덕적 준칙의 요소로서 고려한다고 해도,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꽤나 실현하기 어려운 얘기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속 인간은 예측과 통제를 통해 위험을 최대한 줄이는 방식으로 살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물론 자본주의가 문제다. 또한 자본주의와 분리 불가능한 방식으로 결합된 섹스/젠더 체계와 재생산적 이성애주의, 인종주의와 종차별주의, ‘정상’신체주의와 능력주의가 문제다. 우리가 ‘우연성’을 삶의 원리로서 도입하려고 할 때, 바로 이런 억압의 체제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연성’을 파산의 원리, 죽음의 원리로서 이해하게 만든다. 그런데 여기서 주어가 되는 ‘우리’란 도대체 누구인가? 만약 전 세계의 약 80억 개인이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차이’, 즉 ‘우연’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면 이들을 과연 같은 역사를 가진 인간이라고, ‘우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들이 ‘우리’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일 수 없다면 우리는, 아니 각각의 개인‘들’은 어떻게 세계를 변혁 시킬 단위를 조직해낼 것인가?
다시 리처드 로티로 돌아가보자. 로티는 바로 이런 질문들에 맞서 ‘우연성’ 개념에 기초를 둔 공동체를, ‘연대’를 이야기하려 시도한다. 자유주의자로서 그는 각 개인이 놓인 구체적인 ‘장소’에서부터 변화할 것을 촉구하며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를 일종의 이상적인 상으로 제안한다. 로티에게 자유주의자란 “잔인성이야말로 우리가 행하는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1이며, 아이러니스트란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신념과 욕망의 우연성을 직시하는 사람”2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란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굴욕을 당하는 일이 멈추게 되리라는 자신의 희망을 근거 지울 수 없는 소망 속에 포함 시키는 사람”3으로 정의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우연성의 결과라는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세계 전체의 잔인성(이를 테면 타자를 향한 증오)의 총량을 줄이기 위해 결코 우연적이지는 않을 자발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사람이다. ‘연대’는 바로 이 노력 속에서 “낯선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굴욕의 특정한 세부 내용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창조”4 되는, 상상력의 한 형태이다. 타자의 고통을 나의 문제로, 나아가 ‘우리’의 공동 문제로 다룰 수 있게 만드는 이 ‘감수성’은, 내가 아는 고통이 타자의 고통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자기-의심’을 기반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지점에서 왜 우리가 굳이 골치 아픈 ‘자기-의심’을 해야하며, 또한 잔인성 자체를 과연 인간 본성과 문화 내에서 뿌리째 들어내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다분히 프로이트적인) 질문이 남는다. 그러나 로티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 속에서만 개인의 행복이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고 믿으므로, 이러한 체제를 건전하게 존속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개념의 확장은 필요한 것이라 본다. 요컨대 너의 고통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면, 다른 모든 종류의 고통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나 역시도 고통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논리다. 이것이 비록 ‘우리’의 (불)가능성에 대한 임시적인 결론이기는 해도, 로티의 이러한 태도는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속 편한 관용구로서만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시가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을 뿐, 전시와 적극적인 연관은 없어 보이는 로티의 ‘우연성’과 ‘연대’를 굳이 요약한 까닭은 양자로부터 감지되는 일종의 유사성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티가 ‘우연성’과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전시의 기획과 구성이 ‘우연성’과 맺고 있는 관계가 그렇다. <우연을 기대>의 서문은 “사건의 흐름으로 정립되는 역사의 인과성을 폐기하고, 개인이 속수무책으로 맞닥뜨리는 현재적 우연성에 기대”5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반복성이 우리를 지금보다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기대”6가 그저 ‘보편’이라 가정되는 허구적 ‘진리’의 재생산에 복무할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이다. 아마도 (예술에 관심이 있는) 우리 중 대부분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도덕적이고 제도적인 규범들이 자연으로부터 분유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오직 국가라는 생물을 작동 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로서만 요구되는 ‘보편적 도덕성’, 즉 ‘인간성’은 본성 상 헤게모니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로티와 마찬가지로) ‘인간성’이 아니라 우연한 방식으로 거기서 그렇게 존재하게 된 각각의 “마주치는 개인들”7에게 기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연을 기대>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생산될 예측 불가능성과 반복 불가능성의 ‘마주침’, 즉 ‘우연’이 일종의 철회할 수 없는 ‘사건’을 초래 하리라고 ‘기대’한다. 여기서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은 바로 전시(장)이다. 전시와 관객의 관계 속에서, 작가와 작품의 관계 속에서, 작품과 작품의 관계 속에서 쉽사리 의미화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물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무엇’이란, 우연하기만 하다면 실로 무엇이어도 상관 없는가? ‘우연성’이란 시공간이라는 조건을 가진 모든 대상과 관계에 대입될 수 있을 만큼 유연하며, 그렇기에 자칫 비역사적이고 낭만적인 감상성으로서만 이해될 가능성이 큰 추상적인 개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시가 ‘우연성’을 둘러싼 하나의 독특한, 그러므로 미적이고 또한 정치적인 관점을 생성해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다섯 작가(신민, 시린 세노, 이민지, 장서영, 노예주)가 놓인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우연성’이 전시(장) 속에서 충분히 맥락화되지 못했다는 인상은 언급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제목인 <우연을 기대>와 서문을 제외하고 ‘우연성’이 어떻게 전시라는 미술 언어와 (관객) 경험을 통해 제시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바로 이런 인상을 통해 더욱 불분명해진다.
한편, <우연을 기대>의 기획 일부인 ‘비평 라운드 업’은 “전시라는 하나의 현장 혹은 사건을 여러 시선이 함께 구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감상으로 비로소 구성되는” 미완결적인 전시의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4인의 비평가 중 한 명으로 초대된 나는 애당초 청탁을 받은 대로 “전시 주제 자체가 아닌 전시 테마를 염두에 둔 비평글”을 생산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감상-비평’으로 이어지는 나의 경험 자체가 ‘전시의 주제’와 결코 무관하게 이뤄질 수는 없다는 사실만 재확인하게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예술계에서는 다소 소극적인 용법으로 사용되는 ‘감상’은, 칸트 미학에서의 ‘관조’, 문화 이론/비평에서의 ‘수용’ 또는 ‘소비’, 마지막으로 ‘관계 미학’과 같은 동시대 예술 이론이 강조하는 ‘참여’로 이어지는, ‘수동-능동’ 모델의 스펙트럼 속에서 보다 중립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단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온전히 개인적인 ‘감상’이란 있을 수 없다. 요컨대 작품에 대한 관객의 ‘개입’, 즉 ‘참여’가 곧 일시적 평등의 ‘소우주’를 만든다고 본 ‘관계 미학’ 역시도 그것의 자유주의적인 비정치성과 낙관주의으로 인해 비판받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한다. 우연하기만 하다면 어떤 질적인 개별성도, 구체성도 고려되지 않는 ‘감상’이란, 과연 어떠한 ‘우연성’을 생산할 수 있을까? 어설픈 자세로, 나는 다음의 문장을 대답 대신 인용한다. “우리는 계산 불가능한 것이 존재하기에 계산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곳에서 계산합니다. 그러니까 전략적 내기는 언제나 어떤 결단을 취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혹은 차라리 결단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으로, 철두철미하게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결단들을 내리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8
이하는 전시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청탁을 받고 나면 나는 내가 쓸 글이 과연 이 지면 전체에 있어 어떤 기능을 하게 될지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글의 내용보다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기능이다. 모든 필자들이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전략적으로 또는 ‘계산적으로’ 자신의 ’기능‘을 고려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는 아마도 (다소 삐딱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매체의 페미니즘, 또는 퀴어를 다루는 ’특집‘의 유일한 ’당사자‘로서 호출되곤 했던 경험들로 인해 형성된 습관인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특수한‘ 주제를 다룰 때에 불가피하게 떠맡게 되는 대표성은, 때로 글의 논리와 내용을 ’심각하게 논의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여기게끔 만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연은 반드시 우연이 아니고 필연 또한 반드시 필연은 아닌 것처럼 경험된다. 요컨대 나의 특수성은 보편성의 장에 기입될 수 있는 조건인 동시에 한계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기능‘의 차원에서, 그것은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다. (나는 지금 이 대목을 <우연을 기대>에서 우연히 만난 참여 작가들 중 한 사람을 떠올리며 쓰고 있다. 그는 늘상 자신에게 요구되는 작업이 아닌 다른 작업을 해볼 수 있어 이번 전시가 즐거웠다고 말했다. 나는 감히 그 말을 이해 한다고, 여기에 쓴다. 최소한 그에게 있어 이번 전시는 ’우연성‘의 ’사건‘인 듯 했다.) 물론 지면의 ’영향력‘과 유통 방식과 크기, 독자들의 규모, 기획의 주제와 (나를 제외한 다른) 필진들을 꼽아보며 내 ’기능‘, 내 ’쓸모‘를 타진하며 일종의 ’각‘을 재며 여기서는 어떻게, 얼마나 말할지를 고민하는 일은 누군가에겐 무의미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각각의 사건에 대응하는 각각의 입장을 마련하는 것만이, 내 ’기능‘을 고려하는 일만이, 내게 주어진 지면이라는 상황을 정직하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이 후기는, <우연을 기대>의 ’비평 라운드 업‘의 필자가 총 네 명이라는 사실이 이 글의 내용과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실토하기 위한 변명이다. 부디 이 글의 부족함이 세 분의 글이 형성할 맥락들과 함께 읽힐 수 있기를, 전시를 둘러싼 유의미한 대화를 생산할 수 있는 매개로서 이 글이 기능하길 기대한다.
이연숙(리타) /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의 문화적 형식과 스타일에 관심이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 2021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각주
1. 리처드 로티, 김동식, 이유선 역,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사월의책, 2021, 25p.
2. 같은 책, 25p.
3. 같은 책, 25p.
4. 같은 책, 26p.
5. <우연을 기대> 전시 서문에서 발췌 인용.
6. 상동.
7. 상동.
8. 자크 데리다, 마우리치오 페라리스, 김민호 역, 『비밀의 취향』, 이학사, 2022, 28p.
*이 글은 《우연을 기대》 전시의 전시 연계 프로그램 “비평 라운드 업”를 위해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