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느러미, 거스러미, 물끄러미
지느러미
물고기마다 모양이 다른 지느러미는 위치에 따라 그 기능이 정해져 있다. 가슴에 달린 지느러미는 좌우 균형을 잡는 데에 쓰고 등지느러미로 몸의 흔들림을 제어한다. 지느러미는 뼈와 피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어떤 물고기는 지느러미가 너무 크면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잘라 줘야 하지만 어떤 물고기는 지느러미를 자르면 헤엄을 칠 수 없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된다. 그러나 물고기들은 자기의 지느러미를 싫어하지 않는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중간 크기면 그럭저럭 중간 크기인 대로 살아간다.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어떤 것도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종(種)이 있다. 인간이다. 우리는 도무지 지금의 상태로는 조금도 만족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속눈썹 길이를 싫어하고, 우리의 날씨와 기후를 인정할 수 없으며, 거슬리는 것은 지우고, 마음에 드는 것은 더한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손쉽고 간편하다.
다른 한편, 인간은 현재가 임시적인 상황일 뿐, ‘진짜’ 우리는 이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예컨대 팬데믹과 마스크 착용. 영유아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사람의 표정을 인식하는 것은 사회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표정을 파악하는 일은 곧 타인의 감정과 정서, 분위기를 눈치 채는 일이고, 거기에 공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스크 착용은 언어와 인지 능력 발달에도 영향을 준다. 발음을 불명료하게 만들고, 입술 모양 관찰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팬데믹 종식과 함께 일상으로 ‘복귀’하면, 가족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입술 모양을 관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사회성에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보기도 했지만, 어찌 됐든 이제 아이들은 마스크를 제2의 얼굴처럼 생각한다. 마스크를 벗을 때 수치심까지 느낀다고 한다(오랜 기간 착용하다 보니 나 또한 마찬가지로 수치심을 느낄 때가 있다). 앞으로 영영 마스크를 벗고 다닐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하려고? 계속 쓰고 다니면 되잖아요……. 마스크를? 안 답답해? 어차피 올해 말까지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은 의무예요.
나는 마스크가 인간의 새로운 지느러미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잠시 생각하다가 손톱의 거스러미를 바라본다. 거스러미는 잘라도 된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나 원상 복귀될 테니까. 그러나 지느러미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샥스핀을 만들기 위해 상어를 잡은 후 지느러미만 자르고 몸통은 다시 바다에 떨어트린다고 한다. 몸통은 맛없고 비릿하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데에 비해 가격은 저렴하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이미지에 내구도가 높은 편이지만, 바다 바닥에 덩그러니 가라앉아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머무는 상어의 몸통을 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거스러미
시간은 엄청난 특권이면서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할 수도 있고 망각해 버릴 수도 있지만 몇 개의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축적되면 그 결과물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거나 건설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거스러미처럼 다시 자라나는 것들에게는 이런 선형성이 무의미하다. 내가 전시 《우연을 기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지느러미, 마스크, 거스러미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 동그란 시간에 말하기 위해서다(이 대목에서 나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남편이 부활하기를 바라며 9년간 시체를 보살핀 아내와 최근 더 자주 발견된다는 한국의 회곽묘 미라, 내세에 이 몸을 다시 쓸 거라는 기대와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이집트 미라들 사이의 차이점을 떠올리지만 이 글에서는 전시에 조금 더 주목하도록 하자).
물끄러미
전시 서문은 매머드를 경유하여 과거를 다시 미래에 가져다 놓는 방식으로, 과거를 되살리는 방식으로 멈추지 않으려는 시계를 다루고 그런 시간성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결과 축적된 과거 데이터베이스로 충분히 예측 가능한 미래는 사라지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현재, 올지도 모르는 우연을 기다리는 현재에 주목하게 된다. 《우연을 기대》 전시장은 이 우연성에 기대어 조성되었다. 먼저 전시장 중앙에서 약간 우측으로 빗겨난 곳에 필리핀 마닐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시린 세노(Shireen Seno)와 장서영의 영상 작업이 서로 어깨를 맞대어 붙어 있고, 전시장 입구의 좌측에는 신민 작가의 신작 조각들이 놓였다. 노예주의 회화와 이민지의 사진 작업은 관객의 표준 눈높이를 빗겨나간 곳에 설치되었다.
부피와 색상 때문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신민 작가의 신작 〈가자〉(2022)에서는 그동안 작가가 여러 다른 작업들에서 보여 준 얼굴을 볼 수 없다. 작가가 이전에 참여한 전시 《조각충동》(2022, 북서울미술관)에서는 조각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도록 작품을 뒤돌려 놨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들은 얼굴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덩어리로 전시장에 서 있다. 아무래도 한 개의 공을 차지하기 위해 두 팀이 겨루는 농구를 가리키는 것 같은 요소들이 그들의 몸에 박혀 있다. 바닥에 놓인 작은 조각들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걸어가는 듯하다. 전시 서문은 이 작업에 관하여 “사회적 소수자로 대상화되어온 인물들이 ‘반격’을 시도하는 장면”이라고 쓰고 있는데, 반격이라 함은 보통 뺏긴 공을 다시 뺏어오거나, 나를 찌르는 것에 상응하여 다시 상대를 찌르는 것 아닌가? 그러나 신민의 작업 안에서 “사회적 소수자로 대상화되어 온 인물들”로 보이는 작은 조각들은 그런 식으로 반격하지 않는다. 이들은 게임을 포기한다. 공을 보지 않는다. 더 이상 한 명이 공을 잡아 행복해진다고 다른 한 명이 공을 잡지 못해 불행해지는 일은 없다.
노예주의 회화들은 대체로 자연의 한 풍경을 담고 있는데, 오직 한 작품만이 노란 조끼를 입은 인간의 군상을 담은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혼자서 오롯이 서 있다. 죽어 가는 사슴의 시체와 그를 좀먹어 들어가고 있는 벌레들조차 당연하고 평화로운 수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측면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들과 우비를 쓰고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모습은 즉시 어떤 종류의 걱정되는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마스크를 쓴 것처럼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감지할 수 있다. 노예주의 회화들ㅡ〈몸은 결코 단일한 적이 없었다 #1〉(2022)을 제외한 모든 작업ㅡ에서 우리는 다른 것인 척하지 않는 물감의 흐름을 그대로 볼 수 있다. 흘러내린 물감을 닦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노예주의 것이 아닌 다른 작가의 작업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어떤 방법인데, 노예주의 경우 그 방법이 작업의 주제와 방향, 작가의 정치적 입장과 공명하여 메시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작가의 의견은 어떻게 곧바로 회화라는 형식과 연결될 수 있을까? 연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타당할까? 의문이 생길 때 즈음 우리는 회화 작업 옆에 같은 작가의 작업처럼 슬쩍 놓인 이민지의 사진을 보게 된다.
전시 서문은 이민지의 사진이 ‘잠상’과 ‘잔상’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볼 수 없는 이미지와 이제는 볼 수 없는 무엇인가를 촬영한 이미지는 물론 카메라로 이야기하기에 타당한 소재이며, 이는 구불거리며 자라난 나무들처럼, 흰 옷과 검은 옷의 두 사람 또한 서로에게 얽혀 있고, 수평으로 펼쳐지지 않고 기이하게 평형한 상태로 놓인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로 ‘매끈하게’ 연결된다. 그런데 이 사진들 중 하나의 작품은 나무들과 사람들처럼 얽힌 것도 아니고, 기이하게 평형한 상태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은 머리를 꼬리와 이어 원을 그린다. 이는 ‘아직’과 ‘이제는’ 두 시제의 사이와 그를 이어 붙여 원형(circular)의 시간에 관한 생각을 다시 불러온다. 이 작업은 바로 뒤에 이어 이야기할 장서영의 작업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도 기획의 중요한 선택이다.
전시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장서영 작가의 영상 작업이 놓인 위치이다. 이 작업을 보기 위해 의자에 앉은 관객들의 뒤에는 아무런 작업이 놓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이 작업의 내용과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세노의 영상 작업을 보기 위해 의자에 앉은 관객의 뒤로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따라서 세노의 작업에서 잠시 검은 화면이 나오는 동안 텔레비전의 표면에서 그들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세노의 작업이 가지는 형식이 사진과 검은 화면이 번갈아 등장한다는 것, 이 선택이 전시의 결정적인 포인트였는지 일개 관객인 나로서는 알 길 없지만, 이 점이 전시에 미적인 특질을 부여한다. 내가 전시에게 어떤 우연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작업이 다루는 내용과 주제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이처럼 관객의 시선으로 완성되는 우연을 기대한다는 의미이다.
장서영의 이번 영상 작업 〈오르페우스 후굴 시퀀스〉(2022)는 인간의 한계, 즉 앞과 뒤를 동시에 볼 수 없다는 조건에서 출발한다. 이 조건을 극복하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앞으로 걸어가면서 뒤를 바라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방법을 시도했다가 벌을 받았다. 둘째는 이민지의 사진처럼 몸을 구부려서 원래 얼굴이 바라봐야 하는 방향, “앞을 보게 디자인된” 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뒤를 볼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작업에 요가 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다른 방식은, 아예 눈을 바꿔 끼우는 것이다. 이때 바꿔 끼우는 대상은, 예컨대 머리 뒤쪽에 눈을 다는 것도 있겠지만, 장서영은 그 눈을 아예 다른 종(種)의 눈으로 교체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약간 틀어진 지평선의 세계를 제공하는 360도 카메라는 마치 4차원 시공간의 무엇인가처럼 3차원 공간의 앞과 뒤를 한 화면 안에서 보여 준다.
그런데 이 작업은 앞과 뒤를 동시에 보려는 욕망과 그 구현을 완전히 비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기획과 같은 편에 서지 않는다. 이 작업은 그런 욕망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사랑하는 연인이 거기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오르페우스적 욕망), 또 그런 욕망의 실현은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한 일인지(요가 하는 사람의 몸이 그리는 완벽한 포물선) 부정하지 않으며 360도 카메라의 탄생 의의를 찾아나간다. 전시의 서문은 사람들이 매머드를 되살리려고 하는 일이 과거를 다시 미래에 불러옴으로써 시간을 계속해서 구성해 나가려는 전략의 일환이라고 보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하여 제작된 신작 〈오르페우스 후굴 시퀀스〉는 그런 주제에 꼭 맞는 작업이면서, 전시를 위하여 제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시가 주장하는 방향의 바깥으로 흘러나간다. 하지 말라는 일은 꼭 해내고야 마는 주인공들처럼.
마지막으로, 차원을 뛰어넘는 일이 인간에게 허락된 일인지 아닌지,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복원해내려는 일이 인간에게 허락된 일인지 아닌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결국 그 일은 어떤 기술을 동원해서든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하고 싶거나 진보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인간의 욕망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냥 재미로 그렇게 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어쩌면 매머드를 되살려서 망한 기후를 되살리겠다는 기획은 보기 좋은(그렇게 멋있어 보이지도 않지만) 허울에 불과하고 그냥 ‘매머드 DNA를 이용해서 매머드를 이 시대에 되살리는 게 가능할까? 되살리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런 단순한 게 단순하게 궁금해서 그런 일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 대답하는 한, 나는 전시와 같은 편에 서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시가 관객에게 기대하는 우연이 된다. 나 또한 누군가 내 글을 오독할 우연을 기대하며 여기 선다. 물끄러미 작품을 바라본다.
김얼터 / 전시기획자, 비평가. 《크림》(2020)과 《무저갱》(2022)을 만들었다. 동료들과 함께 캐주얼한 비평을 위한 지면 abs를 운영 중이며, 퍼블릭아트, 마테리알, 게임 제네레이션 등에 기고했다.
*이 글은 《우연을 기대》 전시의 전시 연계 프로그램 “비평 라운드 업”를 위해 쓰여졌다.